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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순 정치평론가 |
마침내 도착했다. 길고도 험난했던 여정을 뒤로하고 이제 투표를 하게 된다. 오늘 정치적 운명이 결정되는 후보자 입장에서는 아쉬움과 회한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서 때로는 한숨을 쉬기도, 또 때로는 머리를 감싸 안기도 할 것이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바람에 휩싸여 정말 냉철하게 후보자들을 평가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나간 모든 것은 서막(序幕)에 불과하다. 길게는 2013년 2월25일 박근혜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짧게는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고 한 이후로 대구·경북(TK) 정치권은 갈등과 알력, 그리고 혼란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TK의 역할과 위상은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2012년 대선, 절체절명의 순간, TK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조용하게 투표장으로 향했다. 대구(투표율 79.7%, 득표율 80.14%)와 경북(투표율 78.2%, 득표율 80.82%)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박근혜정부는 출범했다. TK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박 대통령이 그저 잘 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조용한 성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서운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세상이치다. 하지만 혹시 나만 짝사랑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행여 재주는 곰이 부리고 재미는 누가 보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감정이 앞서기 시작하면 서운함은 배신감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유권자의 투표행태를 연구해 온 정치학자들은 흔히 투표를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로 구분한다. 회고적 투표는 말 그대로 지난 일을 하나하나 따져서 표(票)로써 심판하는 행위다. 보통은 정권 중반기에 있는 총선이 대개 회고적 성격을 띠게 된다. 전망적 투표는 새로운 리더십의 출범을 기대하면서 하는 투표행태다. 흔히 대통령선거는 전망적 투표의 특성을 띤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장으로 변한 곳이 묘하게도 대구와 광주다. 산업화세력의 심장인 대구와 민주화세력의 성지인 광주가 주목의 대상이 됐다.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지역이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바로 권력이동(power-shift)의 전환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지역이 내년에 있을 대선판도를 결정짓는 태풍의 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구·경북이 ‘박근혜 이후’를 두고 깊은 상념에 빠진 것과 같이 광주·전남북도 문재인과 안철수 두 정치인 중 누구를 ‘전략적 파트너’로 삼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양 지역이 고민하는 속내의 본질은 같다. 다만 TK는 살아있는 권력인 현직 대통령, 그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보다 더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를 안고 있을 뿐이다.
오늘 밤 늦게나 내일 새벽이면 선거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바로 내일 아침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다만 어느 정도 그 속도를 줄이느냐 또 하향추세를 완만하게 하느냐만 남았다. 때문에 보수진영은 물론 정치권 전체가 박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경북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주시하고 있다.
이제 선택은 유권자가 한다. 회고적 투표를 하든지 전망적 투표를 하든지 그것은 오롯이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정치권은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했을 대구·경북 유권자들에게 또다시 짐을 지워 미안하지만,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TK의 선택이 대한민국 정치의 린치핀(핵심 축)이다. 어떤 선택이든 반드시 투표를 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