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奢侈)
고 은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바다가 저에게 자꾸 달려오려고 애를 썼으나
저는 조금씩 물러날 뿐 마중나가지도 못하고 바다는 바다일 뿐이었습니다.
빨래줄은 너무 무겁게 팽팽해지고 마른 빨래는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저 세상의 깃발인 빨래와 이 세상의 몸인 바다로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 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꽃의 폐장(肺臟)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 하나가 없고
오직〈하느님 !〉〈하느님 !〉만을 부르고 때로는 아버지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몸으로 누님의 혈맥에 흐르는 갈대밭의 애내(欸乃)를 들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머물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철쭉꽃이야말로 여름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기도 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고 마을 뒤 넓은 간사농지(干瀉農地)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집이 둥둥 떠내려가는 온종일의 물 세상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코 누님이야말로 가을이었습니다
찬 세면 물에 제 푸른 이마 잔주름이 떠오르고
세수를 하고 나면 가을은 마치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소리는 확실하고 그 위에 가을은 한 번 더 깊었습니다
잎진 나무에 겨우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도
그것은 사람에게 빈 나무이게 하고
누님은 그 잎새들과 더불어 이야기했습니다
기역자나 니은자 없이도 새소리 없이도 곧잘 말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도 제대로 놀고 있었습니다
하늘 역시 이 세상인 듯 하늘나라임에 틀림없고
그 하늘이 소리치며 더 푸르기 때문에 제가 눈 빠는 버릇이 자고
어디서인지 제 행선지가 제삼제사(再三再四)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삭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삼라만상을 우러러 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움쩍도 않고 노쇠로 복수(復讎)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울 수도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 아름의 치마폭으로 그 피를 껴안았습니다 쓰러졌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내부가 외부임을
그리고 그 동정(童貞) 안에 내재하는 조석(潮汐)의 고향 바다를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시든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방에는 산 자 죽은 자의 고막(鼓膜)으로 가득 찼고
저는 문 밖에서 숱한 밤을 한 발자국씩 새웠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간사지 개펄을 헤매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 안개방울 달린 빈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陶磁)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죽음을 따라가다 돌아왔습니다
관(棺) 속은 누님인지 나인지 또는 어떤 기쁨인지 모르는 어둠이었습니다
1933년 전북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에서 고은(본명 고은태)은 태어났다.
왜 고은은 시 제목을「사치(奢侈)」라 했을까. 두렵고 섬뜩하던 그 어떤 죽음의 끝에서 느낀 그 호사스런 인간의 우울을 사치로 본 건 아닐까.
시「사치」에 몰입하면, 그의 고향 군산 앞바다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누님인 듯, 꽃인 듯, 피인 듯, 그 우는 곡소리는 밤마다 날마다 몸부림치는 꿈 속 슬픈 진혼곡처럼 들린다. 생에서 죽음이 싹트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 죽음에서 생이 열리는 너무나 혹독한 진리 앞에서, 고은은 비로소 시의 영감에 휩싸일 수 있었으리.
그는 자신을 대오시킨 위대한 스승인 병을 통해 비로소 우주만물이 공즉색(空卽色)이요, 색즉공(色卽空)임을 체득한다. 시「사치」는 병의 문을 열고 바라본 앞마당 가득 핀 꽃의 이야기요, 피의 이야기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언뜻 만진 기적의 또 다른 경이요, 추상의 고움이 깃든 시다. 또한 '누님'이란 시어는 언제나 우리에게 동양적 달관의 경지를 깨닫게 하는 달의 이미지요, 밀물과 썰물에 일렁이는, 사랑의 하모니인 만유인력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음기(陰氣)의 흐름이다.
시「사치」속 누님과 나, 바다와 달은 지금껏 수 만 생을 윤회한 고은의 또 다른 환생의 모습이요, 이 시인의 미래 생에 펼쳐질 차원 높은 영적 세계이며, 기운생동의 세계다.
<해설가>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