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 능소화가
-대상 Libodo에 대해서
유수연
나는 능소화로 나무 가지를 감아 오르고 있었지. 나는 내가 그 나무에 핀 꽃인 줄 알았어. 나는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나무의 우듬지까지 한몸인듯 감아 올라가 피어 있었지.
나무의 눈은 먼 곳의 산과 하늘의 구름을 읽을 줄 알아 언제 비가 올지 말해주곤 했네. 그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음색으로 가득했네. 비가 오면 땅 속에서조차 내 뿌리로 그를 감고 있었는데 왠지 그 길의 내력(來歷)을 나는 알 수 없었네. 어디선가 날아온 길모퉁이 각진 돌멩이. 명치께에 피가 고였네.
(나무 위에 붉게 피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닐지도 몰라 아래 뿌리를 내려다보고 저 이제 그만 가야 할까 봐요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나요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난 네 몸 아니야 나무의 보이지 않는 음색, 생과 주검 그 간격만큼 나를 밀어내고)
저녁의 능소화 낯빛 붉게 흔들리고 있었지. 그때.
1957년 안양 출생인 유수연은 98년 계간『시안』으로 등단했다. 인간은 누구나 드러난 것에 몰두한다. 내면 깊숙이 자신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본 사람은 다 알 듯, 사랑할 때의 떨림이야말로 가장 깊다. 사랑의 거리야말로 순간처럼 짧고, 영원처럼 아득하다. 시어 그대로 아픔이 느껴지는 "각진 돌멩이"는 이 시의 부제로 사용된 리비도의 남성 성적 억압의 상징이다.
2000년 7월『현대시』에 실린「꿈 속에 능소화가」는 우선 탁월한 작품이다. 능소화를 통한 심리적 묘경의 극채색이 무의식 세계의 아래로 끝없이 데려간다. 유수연은 왜 하필 이 땅의 무수한 꽃 중에서 시의 소제로 능소화를 택했을까.
넌출이 솟아올라 하늘까지 가닿을 듯하다는 데서 이름을 따온 능소화. '하늘을 범한 꽃'으로 불리는 꽃. 화려한 다섯 갈래의 꽃잎의 자태로 요염함을 자랑하며 마지막까지 그 모습 그대로 지고 마는 능소화는 영판 기생꽃(妓花)이요 요화(妖花)다. 주홍과 노랑이 마구 뒤섞여 줄기 마디에서 생긴 붙임뿌리를 벽이나 나뭇가지에 붙여 타고 올라가는 이 능소화의 외롭고 쓸쓸한 어깨를 본 이는 상사병이 나고 만다.
"나무 가지"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절대적 믿음을 의미한다. 어느 날 "어디 선가 날아온 길모퉁이 각진 돌멩이"는 변심한 남자와의 이별이라 치자. 시 속 여자는 명치께에 피가 고이는 뼈아픈 눈물과 좌절을 겪는다. "나무의 눈은 먼 곳의 산과 하늘의 구름을 읽을 줄 알아 언제 비가 올지 말해주곤 했네"참 아름답고 애절한 이 시행은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려본 여자만이 그 의미를 안다.
"비가 오면 땅 속에서조차 내 뿌리로 그를 감고 있었네" 역시 백미다. 현실의 실존적 사랑이 여자의 심장에 녹아 어떻게 다시 시로 재탄생하는지 유수연은 절묘하게 빚어냈다.
4연 산문시 형태를 띤「꿈 속에 능소화가」의 백미는 역시 3연 끝구절 "난 네 몸 아니야 나무의 보이지 않는 음색. 생과 주검 그 간격만큼 나를 밀어내고"이다. 개체로서 엄혹한 실존을 자각케 하는 시인의 폭로다. 그렇다. 결코 능소화와 나무뿌리는 한 몸이 될 수 없다. 궁극에 가선 단독자로서의 '나' 의 소멸이며 '나'의 죽음이다.
<해설가>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