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항
김동원
빈 가슴 구멍 난 가슴 별로 꿰매려 거던
누님요, 밤바다 보름 달빛이 기막힌
구계항 한 번 놀러 오이소
한마음 탁 접고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이 세상 잘 난 놈 어디 이꼬
못 난 놈 어디 있을 라꼬
누님요, 세상만사 다 이자 뿌고
아침 햇덩이 한 번 품고 싶거 던
저 고래 떼 파도 위 타고 넘는
동해로 마카 오이소
미주구리 초고추장 듬뿍 찍어
소주 한 잔 허허 호호
소주 두 잔 우하하 호호홋
수평선 끌어안고 쭉쭉 들이키다 보면,
안 풀리는 거 어디 인능교
누님요, 천 년 만 년 사능교
이 한밤 불콰하니 백사장 취해 누워
밀물도 좋고 썰물도 좋은 항구가 되입시더
눈 감으면 저승 눈 뜨면 이승 아잉교
묻지 마소, 묻지 마소
하늘 길 어디로 가는 지 묻지 마이소
빈 가슴 구멍 난 가슴 밤바다 별로 꿰매려 거던,
시끌벅적 갈매기 울음 요란한
구계항 밤 등대 보러 마카마카 오이소, 누님요!
내 고향 구계항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 있는 어항이다.
구계(龜溪)는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과 깊은 계곡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7번 국도를 따라 장사해수욕장 솔숲을 휘 굽어 해안 길을 돌면, 흰 색과 빨간 색 등대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항구이다.
어머니는 떠오르는 아침 해만 보면〈아이구, 바다 속에 장작불 잘도 타는 것 보래이〉그러셨다. 동해바다를 숫제 우리 집의 가마솥으로, 붉은 해를 아궁이의 장작불로, 방어나 고등어나 고기들을 무슨 고봉밥처럼 귀히 여기셨다.
나만 보면 까까머리통을 쓰다듬으며,〈누굴 닮아 이리도 잘 났노〉라며 좋아하셨다. 언제나 엇비슥 웃는 그 청상의 어머니는 봄날 수평선 위에 핀 모란꽃처럼 환하셨다. 선친이 돌아가신 날은 몇날 며칠 장대비가 퍼부었다. 마당에 천막을 치고 문상객을 맞은 나는 마냥 신이 났다. 모처럼 집 마당에 동네 어른들로 넘쳐난 것을 본 나는, 무슨 잔치 날 같은 생각을 했다. 서른의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 관(棺)을 붙잡고 호곡(號哭)을 하시고, 그 설움의 깊이를 알길 없는 난, 맞지도 않는 상복을 입고 천방지축 빗속을 뛰어다녔다. 그 어머니마저 이제 불귀의 객이 되고 만 지금, 어린 아들의 철부지를 지켜 본 청상의 어머니 흉중은 어떠하였을까.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것 같다.
아버지를 산에 묻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알사탕을 사서 올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지닌 채, 동구 밖에서 오도카니 앉아 기다렸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선친의 친구 분을 만날 때마다,〈우리 아버지는 언제 와요?〉라고 물었다. 그러면 바다를 가리키며〈네 아버지는 이다음 돈 많이 벌어 저 바다를 건너온단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남몰래 언덕에 앉아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라도 수평선 너머 붉게 떠오르는 해를 타고 아버지가 물위로 걸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어등(漁燈)을 켜고 바다를 깨워야만했다.
여름 새벽, 우연히 동네 형을 따라 소몰이를 하러 마을 뒷산 봉황산 꼭대기에 올랐던 어린 시절, 그 황홀한 일출의 바다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아침 핏빛의 바다, 물속에 잠기어 꿈틀거리던 붉은 햇덩이는, 아비에 대한 나의 원초적 그리움의 색채였다. 두 팔을 벌려 아침 산정에서〈아버지! 아버지!〉하고 목 놓아 외쳤다. 그러하다, 언제나 고향 구계항은 타향살이의 내게 무명(無明)과 망집(妄執)에서 벗어나게 하는 성소(聖所)이자 씻김의 장소였다. 훗날 고향 사투리로 형상화한「구계항」(4시집. 그루, 2016)은 어릴 때 나를 키워준 동해 바다에 대한 곡진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