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 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 보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속 깊이 움직이게 한 한 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내, 방안을 서성대며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읊조리는 기분은―참 묘한 것이다. 이 소리들은 나직이 방안 귀를 따라 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 이 시어들에 맞춰 피아노의 선율을 소리내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러면 놀란 사방의 벽들만이 이 우스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킥킥킥 돌아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 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하늘 위 흐르는 흰구름의 가슴을 뭉클 만져 보면 된다.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를 쓸 무렵 나는 리프트 사고로 생긴 폐쇄공포증을 극복해 가는 도중이었다.
봄에서 초겨울까지 내내 맨발로 수성 못 뒤쪽의 법이산을 산책하곤 했다. 숲 속은 벚꽃나무, 참나무, 아카시아,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들로 넘쳐났다.
특히, 나는 벚꽃 필 때와 아카시아 꽃망울이 터져 온 숲을 꽃향기로 뒤덮으면, 거의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 천 마리의 꿀벌들이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꿀을 따는 광경은, 시인인 나에게는 또 한 편의 시였다. 극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나는 또다시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 이런 현상이 내 몸에서 일어날 때, 빗물이 떨어지는 온갖 사물의 소리를 듣는 것은 환상적이다. 사물의 형태나 재료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악기소리가 났다.
시「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는 가우 박창기 시인 댁 2층에 세 들어 살 때 쓴 작품이다.
몸이 아픈 사람은 저절로 온종일〈죽음과 삶이 뭘까?〉를 골똘하게 사유하게 된다. 나의 명치 끝 반경 5cm 근방은 늘 무엇이 뭉친 것처럼 마비 증세를 일으켜 호흡이 끊어질 듯 통증이 심했다. 그럴 때면 방의 평면과 입체벽면이 순식간에 4차원 시뮬레이션처럼 빙글빙글 움직인다. 갑자기 면이 사라지는가 하면, 공기 중의 미세한 파동 입자에서 해독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곤 했다. 어쩌다 나 혼자 방안에서 허공을 보며 혼자 중얼중얼 거리면, 아내는 놀라서 소스라쳤다.
시「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은 시기에 태어난 번뇌의 작품이다. 그때 나는 매순간 죽음의 착란 속에서 극심한 자살의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다. 온갖 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소곤거리는 환청은 몸서리쳐졌다.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2시집『구멍』, 2002, 그루)는 행 구분이 없는 통연 형태를 띤 산문시이다.
의도적으로 운문(韻文 ․ 마디글)의 행(行) 리듬(가락)을 파기(破棄)하고, 리듬보다 의미에 중점을 둔 시이며, 운문시가 외재율(外在律)을 갖는 다면, 나는 산문시만이 갖는 내재적 율조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 시는 어느 겨울 눈 덮인 수성못 법이산 숲속 산책에서 돌아와 곧바로 쓴 시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음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을 바엔 ‘에라, 시에라도 미쳐 가볼 데 까지 가보자’는 자포자기의 심경에서 나온 시이다. 삶을 놓으니 그 때 불현듯 죽음 또한 삶의 한 방편임을 깨닫게 된 셈이다. 그 때만큼 인간 실존이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죽음과 정면으로 만나자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외쳐 불렀다. 남자에게 모성 기억은 구원이자 절대 그 자체의 위안을 주었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