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 개 보리 이삭들이 그 밤중 폭풍 속 휘감겨 어떻게 시달렸는지, 캄캄한 칠흑의 두려움 더듬으며 떨리는 우주 가는 숨결 붙잡고, 그 뽑히지 않으려던 뿌리들의 외론 몸부림 겪어 보지 않은 자는 모르지
'가장 큰 슬픔이 가장 큰 아름다움 낳느니.'
아아아아아!, 참혹한 절벽 끝에서 고흐는 절규하고 있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이상한 눈빛 번들거리는 까마귀 떼들 미친 울음과 퍼드덕퍼드덕 머릿속 마구 쪼아대는 그 분열의 비명 속에서, 고흐는 전신의 속력으로 명품 향해 미친 듯이 인류의 심안을 뚫고 있었다
인간 삶은 어쩌면 고해(苦海)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36살 때 밤낮없이 시에 미쳐 몸을 망친 나머지, 갑자기 길을 가다 우주 쇳덩어리로 온 몸뚱이를 맞는 충격에 휩싸였다. 호흡이 끊어지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가슴을 움켜잡고 기어서 집에 들어가 그대로 실신했다. 원인 불명의 병으로 극도로 몸이 쇠약해 2년 새 체중이 78kg에서 54kg까지 빠져 버렸다. 환영과 정신착란으로 공황장애까지 겹쳐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했다. 이따금 발작 끝에 응급실에 실려 가면, 의사는 태연히 신경쇠약증으로 약 처방을 진단한다. 그 절벽의 투병을 기어오르다 만난 시가, 저 참혹하게 일그러진 고독 자 빈센트 반(1853∼1890. 네덜란드 출생 화가)「고흐의 시」3편이다.
나는 그때, 한 겨울 벗 백산과 함께 거대한 팔공산 동쪽 산록인 초례봉에 오르고 있었다. 숨이 멎는 듯한 오장육부 경련을 극복하려고 필사적으로 산악 훈련을 할 때였다. 갑자기 정상 근처에서 수 십 마리 까마귀 떼가 까옥 까옥 까옥 까옥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 머리 꼭대기에 몰려들지 않는가. 불현듯 그때 왜 고흐의「까마귀가 있는 보리밭」(1890년 작)이 순간 떠올랐는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섬뜩하다.
1890(37세)년 7월 27일 고흐는, 어느 농가 짚더미에서 자신의 심장을 향해 권총을 쏴 자살을 기도한다. 이틀 후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한 고흐의 펄떡거린 심장 소리가 그 순간 불길함과 두려움으로 내게 엄습했다. 수 년 간 고흐의 귀혼(鬼魂)에 파묻혀 지낸 나머지, 까마귀로 환생한 그가 지금 나를 저승에 데려가려고 온 듯한 착시를 느꼈다. 한없이 까옥거리는 울음 속의 쇳소리도 싫었지만, 까만 빌로드 빛깔의 번들거리는 검은 날개 짓과 눈깔은 저승사자처럼 금방이라도 내 심장을 쪼아 먹을 것 같았다. 우주는 파동으로 연결돼 있다고 한다. 오로지 한 곳에 집중하면 죽은 귀신도 텔레파시로 불러낼 수 있다고 한다. 그때 체험을 생각하면 지금도 괴기스럽기 짝이 없다.
1890년 7월 자살 직전 그린「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은 고흐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마지막 예술혼의 불길이다. 폭풍 전야의 수 천 마리 까마귀로 환치된 검은 색과 청색 덧칠은 고흐 특유의 강렬한 보리밭의 노랑과 연두에 뒤섞여, 한 고독한 인간의 절규를 듣는 듯하다.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고흐 자신의 말처럼, 이 우주의 가장 큰 슬픔이 가장 큰 아름다움을 낳는 법이다. 나는 분명히 절벽 끝에서 절규하는 참혹한 고흐의 울음소리를「까마귀가 있는 보리밭」그림을 보다가 들었다. 이상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내 뇌수 속으로 파고들던 불멸의 영혼을 지닌 고흐의 흐느낌을 고스란히 들었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