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브레지어
김동원
지붕 위
수코양이
서든
말든,
갸르응
갸릉
암쾡이
몸 젖든 말든,
볼긋 발긋
매화꽃 젖꼭지
첫딸,
초경
젖꼭지
얼었다
녹았다
꽃샘
피해서,
오늘은
브래지어
캡 속
다 모아라
「꽃과 브레지어」는 전통적 가락과 시 행간의 압축의 묘를 살린 운문 시이다. 나는 이 시에서 절제된 시어의 팽창된 힘을 균형에 모아, 의미의 본질을 곧바로 치고 들어가고 싶었다. 세상 모든 생명이 저마다 태어난 자리가 있듯, 시 역시 자궁 터가 있다. 딸애의 생리통이 ‘시가 태어난 자리’라면, 이 시의 씨앗에 촉을 틔운 것은 7년간 마당이 딸린 집에서 생활한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아파트와는 달리 사계절 시시각각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 주택이다. 특히 뜰 안은 서정시의 보고(寶庫)이다.
무릇, 시의 눈과 귀는 아무리 작은 시공간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망을 짠다. 마당에서 벌이는 흙과 꽃, 곤충과 나무는 살아 움직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주의 무한한 상상력과 직결된다. 태양을 비롯한 우주의 별들은 밤낮없이 흙에 양기와 음기를 북돋운다. 나는 식물이 밤을 느낀다는 것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직관했다. 고통과 사색 속에서 인간이 내면을 다지듯, 식물 역시 어둠 속에서 잠을 자며 새 길을 찾는다.
내가 산 그 집은, 밤이면 동네 고양이들의 천국이었다. 듣는 다는 것이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소리가 그토록 시의 무궁한 영감의 신호라는 것을, 전엔 크게 깨닫지 못했다. 한밤중 암·수고양이들의 짝짓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공포 영화 속의 기묘한 아이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여름이 오면 더위도 식힐 겸 한밤중에 지붕에 올라가 사방의 온갖 화음을 듣는 것을 좋아 했다. 밤의 어둠은 그 자체가 음악이다. 사방의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밤하늘 별들은 선명하게 볼 수 없었지만, 초승달이 어떻게 반달을 거쳐 보름달이 되는지, 보름달이 사위어 어떻게 하현달, 그믐달, 끝내는 밤하늘에서 아주 사라져버리는지를 서운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꽃샘추위 무렵, 그 집 마당은 노란 수선화가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트렸다. 꼭 붉은 포도주잔 같은 튤립은 세련된 도시 여자의 감성을 닮았다. 수종이 십년이 넘은 찔레꽃나무에 핀 수백 개의 꽃망울이 향기를 터트리면 수백 마리 벌과 나비들이 그 집 뜰 안으로 유혹되었다. 특히 찔레향기는 짙어 그 꽃나무 아래에 서면 정신이 어질어질하였다. 홍매, 황매, 백매의 자잘한 꽃망울과 13살 딸애의 젖멍울은 크기가 아주 비슷했다. 눈을 감고 뜰 안 가득 잎 새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를 청마루에 앉자 듣는 것은, 시선일경(詩禪一境)의 경지였다. 무엇보다 여름 장마 비가 퍼붓고 난 후에 땅에서 불쑥 솟구쳐 올라와 피던 그 상사화를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알고 보면 이 모든 자연의 세계가 시의 재료이다. 나는 그 당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욕구인, 시의 기양(技癢)을 느꼈다. 봄밤의 암·수고양이의 욕정과 딸애의 초경 젖꼭지와 꽃샘의 시새움을 한 이미지에 꿰어 시의 그릇에 담고자 했다. 시 작품의 아름다움은 근본적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형상화된다. 작품이 일정한 예술적 원리와 질서를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탄생하듯, 나는 시「꽃과 브레지어」를 통해 일상에서 일어난 찰나의 편린들을, 어떻게 한 편의 시 속에 모을 수 있는지 끝임 없이 사물의 ‘안’과 자연의‘밖’을 내응하면서 시어로 갈고 다듬어 탐색했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