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 라온제나 호텔 뒤편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 이곳은 지난 5월부터 재건축을 앞두고 기존 주택‧상가 등을 철거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장을 따라 세워진 울타리 아래로 막힌 도로가 여럿 보인다.
아파트 건설로 기존 도로가 폐쇄된 것이다. 울타리 밖 주민들은 졸지에 사라진 길 때문에 망연자실해 있다. 울타리가 쳐질 때는 동네 토박이들이 나서 이들 도로를 지키려고 공사 관계자들과 언성을 높이고 몸싸움을 벌였다. 소수의 목소리는 이내 묻혔다.
주민들은 행정기관이 이럴 수 있느냐며 도로 폐쇄를 허가한 수성구청과 대구시를 찾아 항의했지만 공사는 강행됐다. 아파트 건설이 절차를 거쳐 승인이 난 이상 도로 폐쇄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설명이다.
대구 수성구 범물동 진밭골 입구 아파트 신축 현장. 공사장 주변에 아파트 주민들이 내건 플래카드가 보인다. ‘주민 동의 없이 도로 팔아먹은 시청은 책임져라’ 등이다. 여기서도 아파트 신축으로 멀쩡하던 길이 갑자기 사라졌다. 주민들이 도로 폐쇄에 당황해 하는 사이 공사는 강행돼 사라진 도로는 이제 지적도에만 남아 있다.
아파트 주민들은 “손발이 잘렸다”며 수성구청을 찾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구 수성구에 재개발‧재건축 아파트 건설로 주민들이 도로를 빼앗겼다며 하소연하는 현장이 잇따르고 있다. 범어동‧범물동 현장만이 아니다. 만촌3동 혜화여고 입구 아파트 신축 현장 인근 주민들도 마찮가지다.
공통점은 대규모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면서 소수이거나 약자인 인근 주민이 오랜 기간 이용하던 도로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도로 폐쇄 항의 목소리는 그 이전과 좀 다른 데가 있다. 꼭 금전적 보상을 부르짖지 않는다.
범어동의 나순희 대표는 “돈 때문이 아니다”며 “빼앗긴 길을 되찾아 이전처럼 이웃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이 목표”라고 잘라 말한다. 범물동 시위 주민들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또 있다. 범어동의 경우 폐쇄한 도로의 소유자 수성구청은 재건축조합에 100억원이 넘는 금액을 받고 팔았다. 이후 처리 등은 알려진 게 없다. 이 금액은 그대로 아파트 분양가에 반영될 것이다.
범어동 주민들은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사람 살 권리를 호소했다. 범물동 주민은 수성구 개청 이래 처음인 민주당 소속 의장으로 구성된 구의회에 관심을 환기시켰다. 대규모 아파트를 허가하면서 기존 도로를 폐쇄하는 그동안의 행정편의적 관행을 지역의 민주당이 얼마나 소수와 약자 편에 서 바라볼지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이게 바로 지방자치단체의 적폐(積弊)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서울 송파구 등은 대구 수성구와 달리 아파트 신축 규모가 커지면 재건축조합 등의 기부채납을 통해 없던 도로를 단지 안에 새로 만들게 한다. 그래야만 주변과 교통 등이 원활해진다며 사업 허가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대구와 정반대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숨겨진 차원』이란 책에서 “길은 사람들의 교류와 만남, 뒤섞임을 가능케 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도로를 이해를 다투는 행정처분의 대상이 아닌 그 지역의 구심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라는 뜻이다.
두 마을 사이에 없던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면 기존 도로는 유지하는 것이 지역 공동체의 소통을 원활히 하고 공공재의 기능에 충실한 방법일 것이다.
민선 6기 권영진 대구시장은 ‘오로지 시민 행복 반드시 창조 대구’라는 시정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부사의 능숙한 구사력이 돋보이는 문구다. 도로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변용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효율 등을 감안해 멀쩡한 도로를 자꾸 없애면 대구시는 ‘오로지 시민 불통’을 낳게 된다.
도로의 새로운 인식. 지방선거를 통해 드러난 민심은 이제 더는 소수와 약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로 폐쇄 민원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동일문화 장학재단 협찬)
宋義鎬 (언론인,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중앙일보 기자(1985∼2017)
저서 『청량산엔 인문이 흐른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