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환 작가- 대구출생 .대구성광고 졸업 .경북대 독문과 졸업 <주요저서>마음 중 단편 .대불(시집) .김대중 .한국전쟁 언저리 .금호강의 영혼(시집)
#매주 목요일 연재
지하세계 1
18. 두사람
한편, 본명이 OOO, OOO인 두 사람은 제2지하국가의 국경선에서 사헤라땅을 마주보면서 자신이 사면되어 제1지하국가에서 살아도 무방하며 사헤라꽃을 국경도시들에서 키울 수 있는 사실도 모른 채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내와 살고 있는 동안 좋지 않은 일을 만난다면 꿋꿋이 견뎌내려는 마음에는 진실이 스며있다. 회색 사랑의 물결을 거부하는 마음이다. 애정에 기초하지 않은 계약 부부생활이 아니다. 공존의 틀은 중요한 것이다. 살아가는 세상에서 삶의 조건들을 부수면서 살아간다면 바람직한 세월은 아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이웃과 싸움을 만들고, 전쟁을 위해 쏟아 붓는 노력으로 꽉 차고, 숨 쉬는 공기를 살인적 방향으로 몰아간다면, 사람들은 그런 사회를 좋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사할리도, 그의 아내도 스스로들 그들의 모국을 어떤 의미에서는 싫어하게 된 사람들이며 그러한 세상의 구도 속에 그려져 있고 어렵게 생존하는 것이 지금이다. 하나하나 먹구름들이 걷히지만 심리적 밑층에 쌓인 묵은 찌꺼기들은 오래오래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아내는 새 생명이 몸속에 잉태되어 조금씩 배가 불러진다. 달콤한 시간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지만 붙잡기는 어렵다. 고양이는 끝까지 쥐를 추적한다. 대부분의 쥐들은 죽는다. 달아나는 자는 살기 위하여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도망가다가 죽게 되지만 살아남는 드문 경우도 생긴다. 약자가 허위허위 비틀거리며 쌓아올린 행복의 섬들이 바다에 가라앉아 버린다면 처참한 세계의 생존질서를 원망할 것이다. 사할리는 조그만 터전에서 살고 있다. 바위틈새에 씨앗을 박아 생명의 질긴 모습을 보여주는 풀포기처럼 그는 살고 있다. 사람이 추락할 밑바닥을 원천적으로 드러내 버리고 나니 더 이상 불행해질 부분이 성립되지 않는다. 불행이 계속되는 불행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세상으로 바뀌어버리면 행복도 무엇인지 느낌을 받기 힘들다. 사할리는 괴로운 시간과 싸우지 않고 있다. 아주 행복한 시간만 존재한다고 믿기는 어려워도 고통의 시간만이 가로막아 서 있지는 않다. 곁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이, 그를 괴롭히며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를 따라올 사람은 사실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철저하게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대응하여 철저히 세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생존을 영위한다. 사할리는 외부적 생존조건이 그를 괴롭힌다면 괴롭힘이 없거나 적은 땅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싸울 만하면 싸우면서 살 것이다. 단련이 된 그로서는 어려워도 살아갈 사람이다. 현재는 인생주기율에서 상승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이다. 사헤라꽃은 무성하다. 저절로 피는 것이므로 자연 권력 속에 사람은 그저 무성하게 태어났다가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존재이다. 사람은 자연 권력 속에 자신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겨우 남긴 흔적이 가장 강대한 왕권에서 만들어진 인공조형물이 전부이다. 사할리는 본의 아니게 사헤라꽃을 피운다. 이제는 그의 손을 떠나 자연 권력이 명하는 생태계법칙에 따라 사헤라꽃이 움직인다. 자연물에 인간은 인간의 힘을 섞어 넣을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자연 권력이 인간에게 원하는 점이기도 하다. 사할리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낳아 훌륭히 기르는 것은 애정이면서 자연 권력에 순응한 결과이다. 자연 권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연시 하는 일이다. 악조건도 그의 아내와 그로 하여금 자연 권력을 이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점과 사헤라꽃이라는 변수로써 자연 권력과 타협을 했다. 조화로운 삶의 전개이다.
군인이 지키지 않는 국경선에 아침이 밝아온다.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보초를 서는 군인이 없다. 민간인들도 밤에 일부러 국경을 지키지 않는다. 제2지하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데 고생을 사서 할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 제1지하국가의 사헤라땅은 더욱 심하다. 아까운 땅이 미개척지로써 주인이 행세하지 않는 현상이다. 군대와 경찰에게 구속되기 싫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국가라도 발생한다. 그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살고 있는 경향이 강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군대는 대부분 국민개병제의 나라이면 개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국가명령에 따라 강제적 기준에서 일이 진행된다. 지원병제도라면 원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대부분 국가는 경찰제도가 존재한다. 강제적 인원보충보다는 지원을 위주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이 맞지 않다. 국경에는 치안을 담당한 경찰도 국방을 담당한 군대도 보이지 않는다. 제1・2지하국가가 붕괴되어 있음을 간접증명 해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사할리는 하루 종일 잠을 자지 않고 견뎌내지 못한다. 낮에는 잠을 깨지만 밤에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밤마다 괴한이나 그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낮에 잠을 자고 밤에는 깨어 있으면서 막아내어야 한다. 그러면 비정상적인 생활이 연속된다. 아내와 두 사람이 합심하고 여의치 못해 집을 지키는 멍멍이를 두세 마리 키운다 해도 더 많은 괴한이 나타나면 속수무책이다. 멀리 떨어진 국경마을 사람들과 모여서 체계를 세워야 가능해진다. 그것도 못하면 괴한에게 당하는 방법이 남는다. 개인이 감당하고 방어할 수준을 넘어 버린다. 못하는 것이다. 사할리가 방어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원시적이며 한심한 단계이다. 괴한이 원시적이며 한심한 사할리를 뛰어 넘어서면 질서는 무너지고 제1・2지하국가의 국경마을은 생존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바뀐다. 무방비의 국경에서 상식적 견해에서 발생하여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상대방을 인식하여 서로 간에 경계하는 군인 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는 마음대로 움직여도 가능한 지역이다. 말뚝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셋째는 완전자유지역이다. 어느 나라의 행정력도 간섭하지 않는다. 넷째는 이웃도 거의 없는 삶을 사람들은 살아간다. 자연적으로 경계를 갈라주는 산맥이나 큰 강이 흐른다면 분명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초원지대에서 국경선을 긋는 것도 무의미한 측면도 있다. 상대방이 침략의도를 분명히 하여 실천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군대는 예비적 상황을 고려하여 조직되어 있다. 제1・2지하국가는 참담하게 무너져서 예비할 능력이 많이 상실된 시점이다. 정신을 쏟을 다른 급한 일에 매달리어 있으므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해도 그만이다. 사할리는 도시에서 숨어 살 생각은 필요 없어진다. 완벽하게 신분이 보장되고 안전이 지켜지는 국경마을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내막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살려고 옮겨올 지역이다. 선입견이라는 장애가 가로놓여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 무서운 곳에서 살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먼. 반응은 일반인들이 느끼는 상식의 테두리에서 나타난다. 국경마을에는 상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초원은 평화스럽고 비돌기는 훨훨 나르고 물가에는 송쇄리가 떼뜸떼뜸 거린다. 만생초도 피어있고 사헤라꽃도 널리 퍼져 있다. 멀리 보이는 초원에는 가족들이 아침운동을 하고 있다. 가벼운 체조를 하고 몸을 움직인다. 공놀이를 하기에는 사람이 부족하다. 집단행동이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이 든다. 개인이 모여 가족이, 가족들이 모여야 마을이 된다. 적어도 마을이 열 개는 모여야 젊은이들을 모아서 국경선을 지키던지 말든지 할 것인데 거주하는 인구가 너무 희박하여 불가능하다. 도시지역에서 국가가 징집한 병력을 먹이고 입히면서 관리해야 하는데 골치 아픈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국가가 관리할 힘이 부치는 현상이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면 모든 것들이 공짜다. 세금이 없는 나라가 부분적으로 성립한다,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혜택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니나 행정 강제력이 거의 파고들지 않는다. 공간부족으로 고통 받는 곳이 아니라 개인에게 너무 많이 돌아가므로 이용을 다 못하는 형편이다. 사할리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좁은 공간에서 겨우 겨우 살아온 지난날 들을 되돌아보면 한심한 지경을 넘어선다. 국경선에서 생각하던 기준이 뒤바뀌므로 가치혼란이 발생하여 아무래도 잘못되는 징조인가? 경계심도 생긴다. 지하에서 사람이 산다면 좁은 곳이다. 여기서는 틀린다. 국경에는 군인이 많고 위험하다. 틀린다. 실개천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날씨가 더운 날이면 발을 물에 담근다. 워낙 사람이 없으므로 발가벗고 헤엄을 치기엔 얕지만 물장난을 치더라도 무방하다. 날씨가 따뜻하면 들판에서 남녀가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더라도 들킬 염려가 없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아도 된다.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므로. 식물이 무성하면 곤충이 생기고, 곤충을 잡아먹는 약간 몸집이 큰 날짐승이 있고, 그 짐승을 잡아먹는 맹수가 생겨야 되는데, 지하국가의 기후조건은 아직 짐승이 나타나지 못한다. 생태계상 진행이 멈추고 사할리 내외 두 사람만 사는 생태계인 셈이다.
사할리는 멀리 가는 일도 생기지 않지만 아내 곁을 떠나지도 않고 떠나서도 안 된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어려운 일이 그들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아이를 밴 여인은 약자이다. 달리기도 힘들고 영양분은 많이 공급되어야 한다. 남편이나 다른 조건들이 임산부를 살아가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된다. 사할리는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아내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행복한 두 사람이지만 아이의 출산을 염두에 두면 나이든 사람이 있으면 훨씬 좋다. 국경선에는 좋은 환경들도 많지만 사회적 공동체에서 또래집단으로 같이 놀 어린이들도 있어야 되고, 할 일은 없으나 노인들의 경험이 임산부를 거들어주고 순탄한 육아에 도움을 준다. 사람이 전혀 거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다. 무심한 바람은 제 갈 길을 마음대로 흘러가고, 휘몰아쳐도, 사람이란 족속이 아무도 반갑게 찾아오지 않고, 태풍이나 비바람처럼 내키지 않는 손님을 맞아 들이 듯 세상은 제각각이고, 찾아가기도 힘든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간직하게 되는 사람들이 서로가 멀어져 버릴 위험을 마음으로까지 헤아린다면, 더욱 떨어진 거리로 다가오는 사람들로 먼 먼 마을로 이어진다면, 국경선의 하루는 무지막지 좋은 곳도 아님이 나타난다. 어울렁더울렁 함께 부대끼는 마을과 마을의 공동체적 부드러움과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내면적 갈구가 서로에게 인정되면서 소속된 감정을 느끼고자 희망함이다. 상대방의 가슴속 한 구석 열려진 곳으로 더운 피가 흐르고 진실을 수용하는 아름다움이 서로에게 물결을 친다면 어디에 살더라도 행복한 한줄기 빛은 영원하다. 공존한다는 것은 나눔의 시작이다. 사할리는 국경에서 몫을 받아들이고 있다. 쪼갤수록 적어지는 빵이지만 맛있고 보기 좋은 처음의 모양을 굶주린 눈으로 홀깃홀깃 마주치다가 거센 이로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는다. 사랑할 덩어리들이 온통 널려 있다. 꽃바구니에 조심스럽게 주워 담으면 머잖아 보배로써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닦을수록 윤이 나고 볼수록 마음이 맑아진다면 거세게 다가오는 인생의 격랑들도 꿋꿋이 헤쳐 나가게 된다. 바람과 진눈깨비가 극성을 부리는 날이라도 지긋지긋한 날씨의 변덕이 걷히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올올이 나날들을 엮어서 은하수 다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아름다운 춤을 춘다. 휘황한 불빛 속에 천사의 날개에 실린 사람들이 밤하늘에 꽃을 피운다. 국경마을에서 마주치기 힘든 별나라를 구경하고 있다. 꿈이 살아 있고 상상의 무늬들을 새길 수 있는 넓고 넓은 하늘, 모두들 그 속에서 영원하기를 바란다. 사할리는 두둥실 떠있는 두 사람의 보금자리에 귀여운 아기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장면들을 만난다. 옅은 기운을 지닌 볼그레한 연꽃잎들이 은하수 숲 속에 동글동글 뿌려져 있다.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아기의 순진무구한 마음이 타고 흘러 연꽃들은 깨끗한 아름다움이 찬찬히 정성으로 피어난다. 하늘에는 빙그레 웃음 짓는 아내의 얼굴이 환하게 가지가지 색깔로 수놓아진다. 하늘에 있던 사람들이 땅속 지하수의 맑은 물속에 헤엄을 치고 있다. 시원한 물에서는 물장구를 일으키고, 따뜻한 물에서는 몸을 덥힌다.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는 온천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려 있다. 무지개 속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맨드라미 붉은 꽃잎이 너부죽이 매달리고, 하얀 빛을 발생하는 이름 모를 꽃이 길쭉한 꽃잎을 널따랗게 벌리고 있다. 수양버들이 땅을 닿을 듯 쳐진 줄기에는 새까만 매미들이 달라붙어 맴맴맴 울음을 울고 그 소리가 무지개에 비치고 반사되어 매미들이 하이얀 나비들로 변해 훨훨 날아다니면서 탐스런 꽃봉오리에 사뿐 앉아 있다. 수증기 사이사이로 사헤라꽃으로 엮은 국경마을의 사할리의 초라한 집이 비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얼기설기 지어진 많은 집이다. 그는 황홀한 꿈을 꾸다가 고요한 터전에 무심히 돌아온다.
꿈속에서 만난 모든 것들이 제 모습을 찾아 없어져 버리지 않고 줄기찬 역할들이 이어지면 그만큼 나아진 세계이다. 나아지려면 사람들이 좋은 생각과 바람들을 어려움을 견디며 지탱해 왔음이다. 판단력을 동원하여 생각해보면 꼭 해야 할 일도 많다. 그 일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렵다면 온갖 지혜를 끌어 모아야 된다. 사할리에게도 매일매일은 아닐지라도 그의 힘을 시험받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다. 굴을 파고 튼튼한 거처를 만들었다 해도 세상에서 모여 만든 도시의 집에 비교하면 집이라고 이름 붙이기 곤란하다. 개인의 능력으로 이룩한 가장 큰 결과물이지만 많은 사람이 모였다면 훨씬 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할리에게 현실적 몫으로 돌아온 굴집과 풀집은 원시적 생존과도 비견할 만하다. 맹수와 기후적 조건, 음식물의 확보, 살생이 일어나는 부족전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지금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다. 엄밀히 더 따진다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지 않으므로 옳은 일은 아니다. 그에게는 어디에 살아도 무방하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도 하다. 국경마을에 사람들이 몰려온다면 다른 곳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는 간점증명도 될 수 있다. 군인들이 몰려오면 전쟁이 가까워 올 징조에 겁이 날 수 있다. 훨씬 나은 삶의 터전임을 알아차리고 적정선의 인구가 늘어나면 살기 쾌적하지만 엄청나게 많이 온다면 혼란과 복합적 고민들도 따라온다. 사할리는 현실을 긍정하여 살고 있다. 삶의 형식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정신적 욕구와 실제적 행동들을 나타내겠지만 그것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파생되기도 하고 자연 속에서도 생긴다. 그는 자연 권력에 의지하여 약간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변화만을 성공시킬 능력뿐이다. 사할리는 사헤라땅에 거대 기둥을 세우지 못한다. 위령탑도 만들지 못한다.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가 운반할 수 있는 돌들을 모아 탑을 세울 수는 있다. 분업과 사회조직의 기능적 결합으로 인간이 일어서는 기초가 될 것이다. 기초적 근거가 되는 사람이 너무도 부족한 땅이다. 아무리 생각을 가다듬어도 자연적 방법에서는 긴긴 세월이 지나야 불어날 사람들이고 빠른 방법은 빽빽이 사는 사람들이 이 땅으로 기꺼이 살려고 옮겨와야 가능해진다. 그 외는 인위적이며 문제꺼리가 생기는 정치 권력적 측면에서 행해져야 될 성질이다. 인간들에게 심한 고통을 느낀 사람이라면 힘들지라도 뚝뚝 별개의 생활터전으로 살아갈 사람들도 있다. 옮기기를 싫어하는 지하국민들은 아니다. 값어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느 곳이던 발걸음이 닿기 힘들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경마을로 이주하기는 더 힘든 조건으로 작용한다. 역사의 줄거리를 듬뿍 담아 넣지 않은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부는 바람은 똑같은 기후조건이지만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정은 무척 달라진다. 국경마을의 공기는 깨끗하다. 그래도 쉽게 깨끗하리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발걸음이 이 땅으로 향하여 직접 마셔보고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심리적 상황들이 달라진다면 똑같은 공기라도 차갑거나, 고통이 수반되거나, 답답함을 넘어서는 공기로 바뀌기도 한다. 사할리가 체감하는 맑은 공기는 그에게만 적용되는 부분이다. 개별적 특수사실을 일반적 모든 이들에게 맞추어 해석하기도 힘들다. 땅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못한다. 씨앗을 뿌려야 싹이 돋아난다. 씨앗이 떨어지지 않는 땅에서 결실을 바랄 바보는 생기지 않는다. 사할리는 국경마을에 무슨 씨앗을 뿌리고 있나? 사랑의 씨앗인가? 평화의 씨앗인가? 땅을 벗어나 사는 형태는 많겠지만 지하국가에서는 통용되기 힘든 영역이다. 가장 밀접한 자연물이다. 땅이 인간을 고통 속에 빠트리는 것은 지진이나 천재지변으로 여긴다. 그런 엄청난 일이 지난 후에도 땅은 존재한다. 지구가 우주에서 부서져 가루로 된다면 땅은 찾을 길이 묘연하다.
벼를 키우는 흙은 맑은 물을 필요로 한다. 잔잔한 모들은 누런 풍년으로 영글어진다. 까칠까칠한 보리나, 수염이 긴 밀도 토양이 좋으면 잘 자란다. 삼라만상을 키우는 것은 여러 조건들과 결합한 흙이다. 땅 속의 물과 흙은 더욱 정직한 법이다. 지하국가의 흙은 곱고 훌륭한 것이다. 전혀 오염이란 관계치 않던 부분이다. 사람들이 생존의 공간으로 차지하면서 인공물과 온갖 일들이 벌어졌고 그 끝나는 길은 예견됨이 곤란한 지경이다. 사헤라땅은 전직 여왕의 힘으로 한 번 뒤덮였지만 제2지하국가의 국경마을은 아직도 곱고 부드러우며 정직한 부분을 간직한 흙이며 맑은 물이다. 흙은 권모술수를 쓰지 않는다. 흙은 인간에게 아무런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하국가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흙과 물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으로 와 닿는다. 인간은 지하를 진정으로 깨끗한 부분으로 존중해야 한다. 흙은 깨끗하고 귀중한 것인데 사람들이 자꾸만 나무들을 베어내고 욕심이 과할수록 지상국가의 아름다운 땅이 메마른 사막으로 바뀌기도 한다. 무수한 건축물을 세워 올릴 사막의 모래이지만 질 좋은 흙이 바뀌어 사막만 넓어진다면 매우 곤란한 형편이다. 과거의 지상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진실하게 흙을 사랑하였으면 바랬다. 국경마을에는 정말 좋은 흙이다. 모두들 이런 깨끗한 곳에 인간의 피가 적셔지는 일을 얼마나 싫어하였는가? 반문할 수 있다. 흙은 사람에게 농작물을 키우게 한다. 집을 짓게 한다. 살아가는 놀이공간을 제공한다. 토양학적 성분비율을 따지면 흙은 물질적인 얼굴로만 다가온다.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있는 거대한 뿌리이다. 인간의 역사는 땅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땅을 넓히려는 욕심이 전쟁으로 이어지고 땅을 잃어버린 귀족이 평민이 되고 한 평의 소유재산도 없는 노예는 자신의 농토를 갖고자 평생을 노력하였다. 땅을 빼앗으려고 칼부림이 권력투쟁이 되고 영토문제로 인류는 서로에게 죽음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땅은 정직하게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천재지변을 일으키기도 한다. 십년 세월만 땅에서 농작물이 생겨나지 못하면 사람은 처참한 지경이 된다. 국경마을의 땅은 깨끗하다. 언제 피가 묻힐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땅에서 나는 것들을 많이 가져간 군주일수록 원망이 하늘을 치솟는다. 적게 가져간 군주일수록 백성들은 좋아한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을 가지고 노비들을 부리면 미개한 봉건국가라고 비난하고 민주적 재산분배가 되는 나라를 원한다. 똑같이 나누자는 공산주의도 싹튼다. 너무나 사람들의 세밀한 정신과 물질구조에 어긋나게 똑같이 나누는 공산주의는 이상적 환상으로 아직까지 옳은 제도가 못된다. 인간이 스스로 발전하려는 것들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은 비슷하나 다른 얼굴이고 다른 지문을 열손가락에 가진다. 땅을 골고루 나누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무조건 똑같게 나누지는 못한다. 땅은 그 뿌리가 무척 질기고 긴 것이다. 사할리에게는 많은 땅이 다가와 있다. 깨끗한 흙이다.
사할리가 사는 굴집 자체가 흙이다. 사헤라꽃을 말려서 다닥다닥 붙였으므로 흙이 몸에 곧바로 닿지는 않아도 천정, 바닥, 벽의 속은 흙벽이다. 사헤라풀꽃 집은 바닥이 모두 흙이다. 겉에만 풀로 덮여 있다. 밖으로 나오면 밟으면서 걷거나, 뛰는 곳은 흙이다. 주인이 없으므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 곳은 그의 넓은 땅이다. 세계에서 그보다 더 부자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하여도 이용할 한도에 직면하여 얼마를 차지하는가를 생각하면 실제로는 어마어마하게 다 필요한 부분은 아니다. 긴 강, 넓은 들, 산맥들이 끝없이 펼쳐지진 않았으나 버금가는 지형조건은 미미하게 구성돼 있지만 한 사람이 차지해봐야 썩 좋은 현상도 못되고 무의미하다는 느낌이다. 국경을 막는 사람도, 지키는 사람도 만나기 어렵다. 군인이 살지 않는다. 주민이 살지 않는다. 그래도 사할리는 아내와 같이 살고 있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맑은 물줄기가 졸졸 흐른다. 오염되지 않은 땅속의 흙이 그의 발걸음에 부딪힌다. 좁은 세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지하국민들이 국경마을을 와 보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지만 현실은 이렇게 넓은 땅이다.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지를 않는다. 시장기능 쪽에서 살핀다면 거래형성이 안되고 빠진 구역이다. 워낙 고가의 땅이면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그런 쪽은 아니다. 너무 저가의 땅이어도 쓸모없는 황무지로 인식되어 그런 현상도 있다. 국경마을은 이것저것도 아닌 특수성격으로 시장이 형성되지 않고 모두들 기억하지 않는, 잊어버린 이상스런 땅이다. 그는 무제한의 흙을 가지고 벽돌을 구워 집도 짓고 탑도 만들고 싶어도 혼자서 시간이 허락하면 가능도 하지만 착수할 마음에는 약간 틈새가 존재한다. 임시방편으로 만든 거처는 충분하다. 벽돌을 만드는 것이 흙에 물만 배합하여 구우면 된다고 알고 있지만 완전한 벽돌장이가 되어서 여러 번 실험을 거쳐서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어야 한다. 도시에서 본 모든 것들을 꼭 재생시킬 이유도 크진 않더라도 편리한 집은 만들어 놓고 살면 좋다. 흔하던 벽돌을 만들려면 흙을 파는 기구부터 만들어야 한다. 너무도 원시적인 기구이다. 돌멩이 중에서 뾰족한 것을 가지고 야금야금 파낸 흙으로 반죽을 하여 반듯하게 만들고 볕에 말려서 돌과 부딪혀 단단한 정도를 점검해가는 것이 무료한 일과 중의 일부분이다. 그것도 아무런 일없이 지내는 것보단 결과물이 약간씩 쌓인다. 시작은 보잘 것 없으나 하루하루 깨부수어 보는 벽돌이 생긴다. 부수어지면 헛고생이지만 헛일을 부지런히 반복한다. 낮잠만 일 년, 이 년을 자기도 어렵다. 벽돌이 많아질수록 아내의 몸무게도 늘어난다. 그로서는 여자가 아니므로 미묘한 여성의 마음의 변화과정들을 이해는 하더라도 정확한 경험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아내도 벽돌이 모아지는 것을 반가워하므로 두 사람 간에 이견을 없다. 다급하게 많이 만들기보다 하루의 일거리만큼 꾸준히 해나가면 무방하다. 처음보다는 모양도 바꾸고 무늬도 새겨 넣고 색깔도 입히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여러 가지 시도들을 차곡차곡 해본다.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에 가까운 것을 만들기가 쉬우며 어려운 모양들을 만들면 크기나 무게가 똑같아지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 사할리는 집을 짓지 않아도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집에서 살던 그였다. 누구든 경제원칙에 따라 분업을 통하여 벽돌을 만들고 기술자가 재료들을 모아서 사람이 편안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사할리는 집을 지은 경험이 없다. 그래도 집에서 살 수 있었다. 그가 먹을 것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만생초를, 언샘을 먹을 수 있었다. 가만히 따져보면 그는 사헤라꽃만 열심히 가꾸는 일만 했다. 아무도 그 꽃을 탐내거나 가꾸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지하국가에서 그는 사헤라꽃에 매달려 있어도 생존이 가능했다. 벽돌을 굽지 않았다. 집을 지으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사헤라꽃이 퍼지길 원했는데 결과는 엉뚱한 땅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퍼져 버렸다. 사할리는 이렇게 흐드러지게 필 줄 짐작하지 못했다. 이렇게 넓은 땅에서 두 사람만 산다는 가정도 해 본 경험이 없다. 한마디로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에 이미 들어서버린 꼴이다. 어느 정도 앞날이 이럴 것이란 정도가 짐작이 되어야 대비책을 세우던지 진로를 결정하던지 하겠지만 벽돌로써 허름한 집을 짓겠지만 그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판단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바보 같은 사할리이지만 아기는 태어날 것이다. 분명히 예측할 수 있다. 날짜를 계산하면 일을 중단하지 않으면 몇 개의 벽돌이 만들어질 것이란 계산도 나온다. 높이를 재고 넓이를 따져보니 한 칸의 공간을 차지할 분량이 나온다. 결과를 모를 때는 그럭저럭, 신나게, 일만 했는데 해야 할 일과 그 다음으로 파생되는 부분들이 드러나자 문제는 일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야 되는 의무감으로 둔갑하는 듯해 몹시 괴롭다. 자발적 의지를 기초로 하였는데 그 쌓이는 산은 세월이 흐르면 한 채의 집이 아니라 엄청난 집을 지을 수 있는 벽돌이 쌓일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집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이다. 벽돌을 만들지 않으면 무엇을 할까? 곰곰 따져보아도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은 사헤라꽃 키우는 것이지만 꽃은 씨앗을 저절로 뿌려서 크고 있으니 그가 상관할 부분이 줄어버렸다. 아내는 노동을 심하게 하진 않지만 곁에서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벽돌이 모인다. 즐겁게 세워 두지만 비에 젖지 않도록 하려니 벽돌을 모아둘 굴집창고가 필요하다. 굴집창고를 만들고선 벽돌을 모은다. 창고를 점점 크게 지어야 한다. 이제는 일의 순서가 벽돌창고부터 먼저 해야 되는 수순으로 바뀐다. 벽돌은 뒷전이 되고 창고를 만든다. 창고는 일의 크기가 작은 단위가 아니라 규모가 월등히 큰 부분이다.
창고 만들기는 그가 아담하게 살고자하는 원리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일이 장시간에 걸릴 예상이 되므로 꼼꼼히 재점검을 해본다. 아무리 창고를 만들어도 벽돌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면 만드나마나이다. 벽돌은 실개천에 담가두면 시간이 흐르면 스르르 녹아버린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비 오는 날 바깥에 내어놓아도 수분을 머금어 부서진다. 필요 없는 벽돌이다. 그가 예전에 본 벽돌처럼 물에 녹지 않도록 유약이 발라진 벽돌이어야 한다. 벽돌 제조자에게서 기술전수를 받지 않고는 그는 온갖 수단을 몽땅 동원해 보아야 한다. 현재로는 비바람에 견디는 유약처리, 굽는 기술이 백지상태이며 이런 형편으로 벽돌을 만들더라도 지붕은 비가 새지 않도록 기술적 방법을 동원해야 된다. 비가 새지 않거나 흡수했다가 말라버리는 정도의 기술수준을 정확히 완수해야 벽돌을 만들어도 무방하다. 지붕을 아무리 연구해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술자에게서 배워야 된다. 그는 바보 짓거리를 그만두고 싶지만 마른 풀로 수분을 흡수하는 법, 바짝 말라버린 벽돌로 물을 흡수하였다가 다시 벽돌이 되도록 하는 원시적 방법을 성공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효과가 증명되지 못한다. 한심스런 일거리를 연구 반복하는 애처로운 개인이다. 개인은 정말로 무력한 존재이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삶을 근근이 살아가는 보기에도 미련한 정도이다. 벽돌을 못 만든다. 물에 녹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그 기술을 스스로 터득하거나 지금은 움직이지 못하므로 훗날 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 참으로 원시인처럼 살아야 되는 순간이다. 땅을 파는 삽도 생산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삽 모양의 쇠를 구하지도 못하고 손잡이에 박을 쇠못도 없다. 쇠붙이를 자유자재의 사용가능한 것들로 바꾸어야 하는 문제는 그로서는 불가능의 부분이므로 사람이 많은 곳에서 구해올 때까지는 문명사회와 동떨어진 생활을 계속해야 된다. 비가 흡수되는 정도의 지붕만이라도 만들 능력을 축적한 다음, 지붕에서 비가 씻겨 내려가는 정상적 지붕을 만들어야 한다. 눅눅한 풀에 흙을 섞어 말리고, 몇 겹으로 만들어 놓고, 물을 뿌려서 물이 떨어지면 밑에다가 마른 풀과 건조한 흙가루가 떨어지는 물을 흡수하도록 열 겹을 겹쳐 보았지만 물의 양이 많으면 그 열 겹도 통과하여 수분이 방울방울 맺힌다. 물을 차단하는 기름성분을 흙가루나, 마른 풀에 섞는, 흙에 혼합하여 빗방울이 집 안쪽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가 구할 수 있는 기름은 풀꽃에서는 추출해내는 것이 매우 어렵고 송쇄리에서 짜낸 기름이나 뼈다귀를 갈아서 석회성분을 이용하는 정도에서 시작해야 된다. 식용의 아까운 송쇄리에서 기름을 짜내는 기술도 원시적 수준이다. 지붕을 만드는 재료에 기름이 발라져서 물이 통과하지 못하는 이론적 토대는 겨우 만들었지만 실제로 성공해야 벽돌을 만들어도 무방하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기초지식 외에는 발전한 단계로 옮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앞선 자가 하는 방식을 따라하면 된다. 따라할 능력이나 형편이 못되더라도 그것에 합당한 방법과 기술이 이미 축적되어 현실화되고 있다. 다만, 누구에게나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 힘들도록 사회의 벽이 막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 몫이 돌아가게 된다. 사할리는 혼자서 할 수 없다. 지붕을 만들 줄 아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삽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지붕과 삽을 만들게 원료를 제공하는 사람도 있어야 된다. 집을 못 짓더라도 더 급한 것은 아플 때 치료할 사람이 가까이 있어야 생명의 보존이 용이하다. 그는 아이를 낳아본 경험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더욱이 아이를 키워본 경험은 전혀 없다. 두 사람은 가까운 사람도 없고, 타인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과정을 넘어야 될 형편이다. 아프지만 않고 천재지변이 안 일어나면 자연법칙대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세세한 부분에서 허둥거려야 되는 일들이다. 국경마을은 혼자서 살아가던지 말든지 내팽개쳐진 땅이다. 아니다. 몹시 좋은 곳이다. 사할리는 자신의 분신이 태어나더라도 두 사람이 죽어버리면 어린아이는 생존해내지 못할 것이란 예측이 든다. 어쩔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모여 산다. 혼자서 살도록 해주어도 결국은 혼자 살지 못하므로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긴다. 국경마을이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는 마을을 만들 기초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 마을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거나 이주 집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 국경마을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려면 그의 자식들이 성장하여 자꾸만 자손을 퍼뜨려야 한다.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인위적 마을은 새 여왕의 통치적 차원에서 가능하지만 제1지하국가 국민들이 싫어하고 신하들도 반대하는 쪽이다. 자연부락이 그의 자손과 타 지역의 사람과 어울려지더라도 그의 지혜의 모든 전수와 다른 곳에서의 사람들의 총체적 지혜가 합하여 후대에 전해진다. 그의 능력의 최고조가 그의 자식이 살아가는 기본토대가 된다. 언제 태어날지 모르나 그의 분신에게 굴을 파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스스로 파던지 더 나은 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붕만 만들 줄 알면, 벽돌도 자동으로 만들어지고, 질그릇도 만들어진다. 집이 만들어지고 저장할 수 있는 옹기도 수북해질 수 있다. 어떻게 하던 지붕을 만들어 낼 생각과 실험을 계속한다. 지혜의 축적은 그 다음 사람들에게 벌써 다른 생활을 보장해준다. 집과 옹기그릇과 저장된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든다. 굴집과 풀집에서 살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인정해준다.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인간이지만 사할리는 지붕을 만들 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지붕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원시인보다는 지붕이 있는 집에서 살아 보았으므로 지붕에 대한 그림들이 그의 내부에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지붕을 가진 집을 지으려 한다. 아예 사람이 태어나서 집을 보지 못했다면 굴속에 살면서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사할리는 문명화된 도시의 모든 것을 경험했고 그의 아내도 똑같다. 집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 몰랐다면 상상속의 집을 설계해 보았겠지만 그들에게는 타인의 도움을 통하지 않고는 지붕을 못 만드는 존재이다.
졸졸 흐르는 실개천에서 송쇄리를 잡는다. 매끄러운 몸뚱이가 손으로 잡으면 미끈 빠져나가 버린다. 통을 갖다 놓고 잡는 대로 채운다. 많이 잡더라도 바짝 말려놓으면 식용이 되므로 괜찮다. 소금 끼만 가미되면 된다. 지붕에 칠할 기름을 추출하려면 쉽지 않다. 양도 아주 많아야 되므로 하루 이틀에 해결이 나기도 곤란하다. 등불을 밝히는 기름으로는 하루 일과가 아니어도 충분히 사용한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 굴속의 어둠을 밝혀준다. 바짝 마른 풀에 기름을 묻혀 놓으면 불이 일어나기 쉽다. 지붕은 불에 타지도 않아야 된다. 마른 풀, 송쇄리 기름, 흙을 배합하여가면서 실험을 해보지만 워낙 기초지식이 없으므로 번번이 실패이다. 쉽게 만드는 기와지붕, 시멘트 슬래브 지붕, 유리지붕, 함석지붕, 슬레이트지붕, 어느 것 한 가지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지경이다. 등불에 사용하는 기름은 너무 많이 굴속에 저장하기 위험하다. 캄캄한 밤은 사라지고 어두운 불빛 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시간이 그에게 남는다. 아무 일도 못하는 밤이었는데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시간대가 확보된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지만 그래도 송쇄리 기름 때문에 골똘히 생각하는 부분이 생겨난다. 사할리는 집을 짓는 일에 신경을 쓰다가 쉽게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신적 의미를 따지는 쪽에 시간이 할애된다. 원래 그는 집이 있었다. 사헤라땅으로 가고는 혼자의 집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두 사람이 집을 만들고 살고 있다. 당연히 있는 것이 집이다. 집이 있어야 아기를 낳을 수 있으니 집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이다. 누가 만들거나 이미 성립된 근거 위에 일이 발생한다. 이미 있다는 것은 선조와 후손의 개념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날 때부터 집이 있어야 출생이 가능하다. 공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차지하였고, 차지하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있는 것에서 시작이 된다. 부모가 있다. 공간이 있다. 영양분이 임산부에게 공급되었다는 결론이다. 있는 것에서 시작된 일인데 계속적으로 있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서서히 고통으로 사람에게 돌아온다. 사할리는 생존하도록 되어 있다. 공기, 물, 흙, 자연조건과 후손이 태어나게끔 아내가 있다. 하기야 남녀가 만나서 후세를 키우는 것이 자연 권력에 따라 순응한 자연적 결과이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당연지사이다. 어떤 조건에서든 있는 것에 더 있도록, 더 쓸모 있는 것이 되도록, 보태어야 하는 것은 그와 아내의 몫이 된다. 살다보면 많이 있다고 생각되던 것들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도 맞다. 열 명의 자식이 태어나 있던 것을 갈라서 사용하면 줄어든 현실에 분가한 자녀들은 놀라겠지만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분명, 자랄 때는 농사지을 땅도 넓고 집도 컸지만 열 명이 나눠가지니 참으로 좁은 농토가 되고 모두가 농토를 가지지 못하고 농토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직업을 구하게 된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밖에 방법이 없다. 집도 지어야 된다. 초가삼간은 초가삼십간으로 바뀐다. 있는 것에서 시작된 일이 1/10로 없는 것으로 현실화된다. 땅값이 10배로 오른다. 땅값이 열 배가 된들 쌀 생산량이 열 배로 되지는 않는다. 전쟁, 전염병, 홍수, 가뭄 등이 있어야 하는 지옥이 된다. 원래 있던 것에서 1/10로 줄어든다면 대단히 한심스런 지경을 느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너무 마음이 좋은 사람은 1/10 지키기 어렵고 악착같아야 1/5를 차지하는 지독한 생존의 몸부림이 일어난다. 흥부는 피임도 못했고 생존이 어렵다. 놀부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보니 자신 이외는 부양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박이 터지는 것은 현실로는 불가능하나 소설로는 가능하다. 잠시 독자나 관객은 착각을 하는 것이다. 사할리는 1/10로 줄어들더라도 후세들이 큰 불편 없이 땅을 차지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다음 1/100로 줄어들고 1/1000로 줄어들면 생존의 법칙이 서서히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1,000개의 굴집을 만들려면 일 년에 30개씩은 만들어야 하고 한 달에 세 개는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 놓은 굴집에 살지는 몰라도 이주민이 오던지, 후세들이 급작스럽게 불어나면 그것도 금방 바닥이 날 것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둔갑된다. 쌀이 많은 것은 없는 것이다. 자연조건이 아주 좋아 살기 좋은 곳은 그렇지 않은 곳이다. 좋을수록 모여들고 나누면 없어진다. 없는 곳에는 모여들지 않는다. 없는 곳으로 알게 되면 사람은 오지 않는다. 있어도 없는 것으로 보일 때 없는 듯 있는 곳은 훨씬 살기가 편리하다. 있는 듯 없는 곳은 싸움이 생길 풍토가 조성된다. 땅은 거짓말을 못한다. 생산량을 늘리고, 줄이는 속임수를 사용하지 못한다. 송쇄리도 너무 많이 잡아서 씨가 말라버리면 맛있는 고기조차 구하기 힘든 세상이 된다. 사할리는 실개천에 송쇄리가 사라지고 사헤라꽃밭이 온통 굴집으로만 바뀌고 너무 시끄러운 국경마을이 된다면 아주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적정한 수준의 인구로 안정된 마을을 원하는 것이다.
그는 아내라는 의미에 대하여 현실적 접근을 잊어버리고 늘 이상적인 환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합당한 사람을 구하는 세월이었다. 한 번도 이상형이 아니므로 여자가 없는 세월이 되었다. 구하고자 하는 상은 사람에 따라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데 대상에 따라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게 배열된다. 고정된 인식은 바꾸기 힘들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끝끝내 이상을 추구하거나 가장 현실주의자로 바뀌기도 한다. 일반인이 선택하는 타협의 길이 쉽게 생기지 않으므로 객관적 위치에서 관찰해보면 답답한 지경이다. 이성의 판단이 끼어들수록 선택은 늦어진다. 반대로 아무런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무목적의, 맹목적인 관계가 성립된 후 흐지부지되고는 끝난다. 어린이들이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노는 것은 자연적 결합이다. 자연적 결합이 부서지는 것은 부모들의 개입에 의한다. 어린이는 가치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서히 비교하는 사회성을 느끼게 된다. 기운이 나보다 센 것 같다. 무엇으로도 이기기 곤란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유형이 나타난다. 반대로 모두가 자기보다 약하고 어리다면 명령이나 놀이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처음에는 또래집단을 따라다니며 모방을 하다가 이끄는 위치로 바뀌고 더 나이가 들면 다른 영역으로 자연적으로 이동해 버린다. 사할리도 자녀를 키우고는 늙어서 자녀들이 짝을 찾아서 사는 것을 보게 된다. 굴속에 다소곳이 아름다운 아내는 할머니로 변한다. 열 명의 자녀들은 무슨 일을 할런 지, 몇 명의 후손을 생산할지 미지수이다. 대체적 윤곽은 그리지만 꼭 그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붕을 만들 아들, 삽을 만들 딸, 도움이 되는 재료를 공급하는 아이들이 생긴다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삶의 조건들이 많이 바뀌어져 있게 된다. 꿈꾸던 변화가 완성되어 살기가 좋아졌다고 여겨지면 사할리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 기다린다. 현실은 아직도 굴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각 속에 만들어지는 세계는 현재의 상태를 넘어서는 기초에서 시작된다. 거의가 현재보다 못해진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실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상식적으로 사회가 운영되지 않는다는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나아진 세계를 염두에 두지만 굴집보다는 못한 경우는 그 곳에서도 살기 힘든 상황의 연출이다. 굴집의 무너짐으로 예전 수준의 굴집이 불필요해지면 더 힘들게 파야 된다. 잠을 자는 동안에 무너지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로서는 굴집이 어느 정도에서 폭삭 주저앉을지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 사할리는 혼자 힘으로 굴집의 안정성을 점검하여 수명이 이백 년이 간다는 보장을 확보하지 못하는 능력부족의 사람이다. 엄밀한 조사에서 잘못이 드러나면 그는 헛수고로 만들어 놓은 많은 굴집들은 이용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안전점검을 할 장비가 하나도 없다. 원시인들이 예전부터 살던 굴집이 있으면 좋으련만 원시인이 살던 땅은 아니다. 사할리 자신이 살아보다가 무너지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 다음 사람이 사용할 지경인데 그는 실험용 사람일 수 없는데 할 수 없이 안전의 문제에서는 무방비에 가깝다. 피땀으로 만들어 놓은 굴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제일 안전한 곳은 오히려 땅위의 풀집이다.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면 굴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느 굴집이 가장 튼튼한지 구별을 못하는 그이다. 곰곰 생각할수록 굴집보다는 움막으로 만든 땅위의 집이 더 낫다. 나은 줄 알지만 지붕을 만들지 못하는 문명인이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움막집, 풀집, 굴집에서 지붕을 만들고, 안전의 점검을 잘하지만 사할리는 문명인인데도 불구하고 움막도 못 만들고, 굴집의 안전성도 확보하지 못하고. 지붕을 지을 줄 모른다. 문명인은 모든 조건에서 원시인보다 생존의 보존력이 낫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반대인 것 같다. 원시인이 출현하면 그보다 월등히 생존조건이 나은 환경을 만들어 살아갈 수 있으며 그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능력들을 갖추게 해 줄 수 있다. 사실, 문명인들은 개인으로 쪼개어 완벽하게 사회성을 차단해 버리면 참담한 정도로 무력한 개인이다. 원래부터 당연히 있던 문명의 혜택이 단절되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전개가 연속된다. 그의 능력은 사헤라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막혀버리면 그로서는 문명사회에서 다른 것을 찾아나서야 되고 국경마을에서는 바보스런 존재가 된다. 지하국가를 떠난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이 원래 행하던 것들이 아니어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서 적응하여 살고 있다. 국경마을에도 문명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어떻게, 어떤 방향에서 흘러올지 예측이 불가능이다. 그로서는 기후의 변화에 민감하고 그 기록들을 약간씩 축적하는 단계에 이른다. 비가 오는 날이 어느 정도의 주기이며 양은 얼마나 차이가 있고 풀집이 부서져 버리는가? 굴집에 기록하게 된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물의 공급에도 문제가 생기지만 굴집, 풀집이 손상 받는 일은 없다.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자꾸만 많아지는 듯하다. 그는 타인이 왜 도움을 주지 않는가? 생각하여 보면 그는 모순에 빠져 있다. 그는 제1지하국가에 가서 살 수 있는데 모르고 있다. 제1지하국가의 공권력이 그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국가적 능력이 그를 문명인의 삶과 동떨어지게 살도록 하므로 그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경험칙으론 약간 문제도 포함된다. 사람은 문명을 거부할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더 많은 혜택을 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의 기대수준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져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들이 제공되어 있더라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높아진 욕구수준이 저절로 낮아지기는 힘들고 현실과의 괴리에서 사람들을 달래야 하는데 그 부담은 지하국가를 이끌어가는 집단에게 부과된다. ‘말은 더디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더라도 늘 뒤쫓는 일은 행동 쪽이고 앞서가는 것은 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신용하기 꺼려한다. 말이 앞서면 진실성이 모자라는 듯하고 행동이 앞서면 문제 있는 사람으로서 합당한 행동이면 무방하나 법과 질서, 사회성에 어긋나면 모든 제재를 받게 된다. 문명사회는 행동에 수많은 제약을 가한다. 머리를 단정하게 깎아야 하고, 아무 의복을 입을 수 없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적절하게 인사도 해야 하고, 공손한 태도로 타인을 대해야 하고, 알게 모르게 구속을 한다. 거친 말씨를 사용해서도 안 되고 마음대로 하라는 것들은 많지 않다. 그는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구속성에서 저 멀리 비켜나 있다. 자율적인 방법의 질서유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서로가 공존할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이 무너지지 않고 지탱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국경마을에는 같이 지탱하고, 협력할 여건이 안 된다. 국경선은 쪼개고 쪼갠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토를 가르고, 사람을 가르고, 같은 것까지 공유하기 힘들게 가로막아 놓는다. 문명은 이동을 한다. 인간들에게 낱낱이 전파가 된다. 인위적 장벽이 국경이다. 각각의 나라에서 다르게 적용된다. 끝내는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게 되겠지만 그 전파에는 긴 시간을 요한다. 아주 다르게 적용되어 다른 모습의 문명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에게 좋은 것이라면 아무리 장벽을 높이 치더라도 그 벽을 넘어서 멀고 먼 곳까지 전달된다. 그가 사는 국경마을도 시간상의 차이일 뿐이지 연결고리가 떨어져 나가서 영영 문명과 거리가 멀어져 잊힌 땅으로 묻혀버리기 힘들다. 원하던 원치 않던 사헤라꽃은 자연법을 따라 자꾸만 번져가면서 메시지를 전파한다. 이미 알려진 사헤라땅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거부와 질시의 대상으로 새겨진 형편이다. 문화충격이 너무나 세었으므로 쉽사리 지우기가 힘들다.
갈수록 몸이 무거워지는 아내를 위해 그는 정성을 쏟게 된다. 물질적으로 표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대단한 것은 못된다. 정신적 관심을 겉으로 판단하기가 힘들다. 사람의 판단력도 전지전능하지 않다. 더욱이 일개인이 결정하는 과정은 훌륭한 것이지만 검토와 견제작용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타인이 생각하기엔 틀리는 부분이 섞이기도 한다. 국경마을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일반적 기준에서는 인적이 보이지 않는 마을을 염두에 둘 수 없다고 판단 짓는다. 개별적 느낌이 대세에 짓눌리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정해진 길을 완전히 뒤바꾸어 살기 힘들다. 아예 뒤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마음에 있어야 꿈도 꾸는 것이다. 국경마을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영원히 기억되지 못하는 땅이라면 그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과히 나쁜 것도 아니다. 똑같지 않은 적용영역으로 인하여 사헤라땅, 국경마을에도 사정만 허락하면 거주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국민은 없고, 영토는 있으나 한 사람이 혼자서 이끌어가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마을도 아니다. 자연부락이 생길 여건은 더욱 아니다. 현실 속에서 가장 빨리 가능한 것은 이주에 의한 마을건설이다. 그로서는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힘을 축적한 강대한 집단은 내부적 문제로 싸우기보다는 바깥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 집단은 그들 나름의 방식을 적용하면서 다른 집단과의 상호관계에서 조정된 모형으로 나아간다. 그에게 외부적 힘을 행사했던 강제는 제1지하국가의 집단논리였다. 집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사와 어긋나는 강제에 대하여 거부적 표현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꾸만 거부할수록 그 집단은 스스로 무너질 운명이 된다. 모래알갱이처럼 흘러내리지 않으려 시멘트 성분을 결합할 때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야 되고, 시간도 충분히 제공되어야 탄탄해진다. 집단을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자인 인간이 집단에 귀속하여 보호받고자 하는 안전의 욕구도 포함된다. 집단이 질서를 잃어버리고, 안전의 유지가 깨어지면, 개인도 지탱하기 어렵고, 집단도 무너진다. 자연현상은 개별적이 아니라 자연법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인간도 넓은 의미에선 인간이 반응하는 방식대로 살지만 그 현실상은 가지각색이 된다. 갖가지 모습에 인간들은 개개인의 의미, 사람들이 보는 의미들이 섞이어 사회상으로 나타난다. 직업이 발생하고 인간사의 낱낱이 대동소이하면서 다른 일들로 채워진다. 특이한 삶을 살거나, 사람들에게 정서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들은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정신병을 앓게 되는 사람을 관찰하는 의사라면 병에 대한 판단기준에 따라 사람을 환자로 여긴다. 거의 혼자 살아온 사람인 그에게 누구도 환자인지 판단내리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이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는다. 기준을 정할 대상이 없다. 범인을 체포해야 하는 직업의 사람이라면 약간의 의심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것이 범죄이다. 분명한 심증이 가더라도 증거가 확보되지 않으면 재판에서 판결이 되지 않는다. 증거를 없애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어떤 나쁜 목적을 달성하고자 계획하고, 실천한 사람에게 양심, 도덕을 찾을 필요는 없겠지만 꼭 범인을 찾아내려는 것이 범죄인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심리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사회와 멀리 하고 있으므로 갖가지 인간 공해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자연공해도 물론 발생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인간으로서 서로가 공해를 발생하여 괴롭게 살아간다. 해로운 인간끼리 모여서 해로운 일만 골라서 하고 악순환의 고리를 연장하여 탑을 쌓아 놓으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경마을에 약간의 변화를 일으킬 사람이 올 것이다. 그와 아내가 살고 있는 곳에 아리따운 여인이 와도 아내에게는 짐이 되고 멋있는 총각이 와도 그에게는 부담이 된다. 대체적으로 가정을 가진 사람이 온다면 평균적 의미로 대등한 이웃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 외의 한 사람씩 와도 두 사람이 사는 구도에 치명적인 흔들림을 만들 수도 있다. 서로 돕는 것은 공동선을 위하여 분명한 일이지만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선 약속과 규칙이 만들어진다. 약속과 규칙이 자꾸만 어려워지고 서로가 감내하기 힘들면 갈등국면이 조성된다. 그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젊은 사람이 나타나면 반가운 대상보다는 경계의 상황이 연출된다. 너무도 당연히 협력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알게 모르게 그어질 좁다란 사람과 사람사이의 경계선이 국경선의 자리를 대신한다. 누가 먼저 왔느냐에 따라서 그가 주도권을 행사한다지만 군대조직도 아니고 구속력이 없다. 구속력이 희미한 상태에서 젊은 청년이 주도권을 빼앗을 수도 있다. 참으로 심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사회구조에서도 너무 늙으면 젊은이보다 훨씬 못한 대접을 한다. 젊은 사람은 지도자의 위치에는 능력이 앞서도 앉기가 어렵기도 하다.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그의 마음과 몸이 떠나 버리면 국경마을에서 그의 아내는 심리적 파탄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공격해 올지 알 수 없다. 모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것들이 많지만 당장에 싸움이 일어날 불씨들도 간직한 상태이다. 문명사회일수록 이혼율이 증가하여 사회문제화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모여서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의견에 싫은데 따라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열 명이 모이면 한 사람을 내세워야 할 지경이다. 백 사람이 모인 국경마을이 되면 꽤 시끄럽게 돌아가는 처지가 된다. 백 사람은 그들 나름의 인생이 있다. 서로서로 다르므로 분업과 역할의 분담이 가능해진다. 사람이 올수록 그는 선점하던 땅을 싫지만 조금씩 분배해주어야 된다. 어떤 경우에는 몽땅 이유 없이 빼앗길 수도 있다. 그는 사람이 오게 된다면 기본적으로 우호적 태도를 취하지만 방어본능과 자기안전 확보요구가 발동된다. 사람은 사람에게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위협적 상황으로 돌변할 변수가 포함된다. 협력과 공존으로 잘 나가다가 갑자기 반대의 입장으로 뒤바뀌어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국경마을에서 조심스럽게 같이 받아들여 살아갈 사람도 그렇게 넓은 범위의 사람이기는 힘들다. 문제는 그에게 전혀 선택권이 없는 살려고 오는 사람의 일방적 권리이다. 정말 위협적 요소이며 곤란하다는 판단이 서면 쫓아내야 하는 모순에 직면한다. 국경마을에서 군인도 없고, 마을 사람도 없는데 그는 방어할 능력 또한 없다. 그렇지만 생명이 위협받으면 안전권의 행사와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강대한 군대가 그를 압도하면 실제적 저항권은 행사하지 못해도 양심에서는 적국의 군대에 반대할 것이다. 실제로는 무력 앞에서 반대를 못하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협력해 줄 사람이던, 그의 안전을 박탈할 적군이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협력의 모형이라도 대비책이 필요하고, 반대의 경우도 또한 같다. 살기 좋은 세상에 온갖 국경이 현실로 존재하고, 지역마다 지역권이 존재하고, 사람마다 거리권이 존재한다. 친밀한 사람일 경우에는 덜 하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인간들이 심리적으로 떨어져야 하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넘어서면 사람이 사람에게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가 만나야 될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낯선 사람간의 거리를 띄우고 만나야 한다. 세월이 흐르고 접촉이 잦아져야 떨어진 거리거리가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정상적이 된다. 국경마을에 와서 어디에선가 사는 낱낱의 사람들은 제1・2지하국가의 국경선만큼이나 안전거리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 안전거리가 너무도 벌어져 있으므로 인간적인 외로움과 동시에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새로운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자신의 안전을 누구에게나 요구하고 말할 수 있는 절대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존재이다. 사람들은 어디에 가던, 무슨 직위에 있던, 안전거리 확보에 있어서는 한심한 수준밖에 못된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세도가들도 한 평도 안 되는 비좁은 감옥에서도 살아야 하고 고통스런 세월도 있을 수 있다. 그에겐 열려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힘들지만 그래도 온다면 그에게 더 넓은 세상을 만들어 줄지 한 평의 감옥을 만들어 선물할지 미래는 예측이 쉽지 않다. 어쩌면 현실의 이대로가 좋아서 그는 힘들어도 그렇게 사는지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