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
정일근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일년 삼백 예순 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 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랑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흔히 마음으로 사모하는 노래를 연가(戀歌)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설레고 두근거리거나 이별 후 슬프고 안타깝고 두렵고 가슴 아픈 모든 글자에 심장을 의미하는 마음 심(心)을 넣었다.
『열자』의「탕문」편에 보면, 춘추전국시대의 명의 편작이 뜻은 강하나 기(氣)가 약한 사람과 기는 강하나 뜻이 약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두 사람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바꾸어 놓으니 두 사람은 집을 서로 바꾸어 찾아가고, 처자식도 바꾸어 알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옛 중국인들과 고대인들은 마음이 머리에 있지 않고 심장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아직도 사랑만큼은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알아듣는다고 믿고 산다. 정일근의「연가」속에는 첨성대를 배경으로 신라 천년 역사 속에 어룽진 두 비운의 사랑이야기를 시 속에 응축시켜놓았다.
미당 서정주의『신라 초』와는 또 다른 느낌의 이 시는 신라의 정신과 신라인의 사랑 깊이를 독백 형태로 탐색한다. 정일근은 분명 어느 한 순간 신라 천년에 접신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속에 들어가 그토록 신라인들이 염원한 저 첨성대 위의 그 순수한 별빛을 찾아낼 수 없었으리라.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인지 모른다. 아마 우주 삼라만상을 다 합하면 단 두 글자 '사랑' 이란 말로 태어나리라. 시인은 사랑과 이별한 자의 눈물만이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름을 직관한다. 그리고 또 그 아픈 신라인의 모든 통증을 경주 남산 돌 속에서 찾아내 시인의 현실 속으로 끌어안을 줄 안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워 / 초승달로 떠 있다가 /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그 곱고 애절한 그리움은 하늘과 땅을 돌며 시 속 화자의 눈물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아름답게 승화되고 있다.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이 측은지심이야말로 정일근의 개인적 굴곡에서 따 모은 온 세상 사람에 대한 사랑의 숭고한 보시(補施)의 정신이 아닐까.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