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송수권의「여승」의 시적 상황은 고뿔 앓는 사춘기의 소년이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고깔 쓴 여승"이 염불 외는 것을 훔쳐보는 것으로 송수권 개인의 직접적 체험이 시 속에 녹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춘기 소년의 순수한 호기심과 여승의 종교적 성스런 순결성을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황홀한 마음”, “낮달의 포름한 향내”로 표현한다. 특히, 시인 이승주의 표현을 빌면 “포름한 향내”는 삭발한 앳된 여승의 윤기 나는 머리의 '시각의 후각화'로, 시적 화자의 함축적이고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곱고 애잔하게 클로즈업시킨다.
사실 이 시의 백미는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압지요"라는 구절 속에 들어있다. 소년의 사랑을 비껴가는 여승의 내면적 심리가 암시(暗示)로 나타난다. 암시야말로 상징과 비유를 넌지시 깨우쳐 뒤받침 해주는 역할을 하며 시어의 뜻을 직접 말하지 않고 에둘러 분위기를 풍긴다. 심리학에서 암시는 직접적 행동을 불러일으키며 상당한 최면 효과도 지닌다. 아니나 다를까, 송수권은 바로 그 다음 시행을 통해 소년의 심리적 행동을 직접 유발시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로 '여승'에게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까움과 종교적 성스러움으로 승화시킨다. 송수권은 1940년 전남 고흥 출생이다. 시「여승」은 시집『산문(山門)에 기대어』속에 수록된다.
김동원(사진)
약력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텃밭시인학교』시창작교실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