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막을 내린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배우 이름보다 극중 배역의 이름이 더 유명세를 탔다. 이병헌 보다는 유진초이가 김태리보다는 고애신이 변요한보다는 김희성으로.. 이름이 존재감을 가지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충분히 보여준 드라마였다.
드라마에서조차 이름의 무게가 이 정도면 사회구성원 전체가 사용하거나 집단이 이용하는 이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신중해야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쓰는 명칭은 소속원들의 수준과 생각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기에 까다로우면서도 예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백컨대 필자는 이름에 대해 매우 까탈스럽다. 얼마 전 ‘제왕’이라는 술을 접하고 대구에 아직도 이런 이름의 술이 있음에 약간 놀랐다. 1980년대 말 서울의 기자들이 대구를 보고 지적한 것 중 하나가 아파트 명칭이었다. 그들은 황제 황실 팔레스 궁전등을 열거하면서 ‘대구는 자긍심이 대단한 동네인가보다’며 웃던 모습이 생생하다.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제왕이라는 이름의 술이 출시되고 있으니 대구는 참으로 변함이 없는 도시인 듯하다. 이 술을 내놓은 회사의 사내문화는 아마도 수직적이며 권위적일 가능성이 높다. 상표는 그 회사의 수준과 문화를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술은 뒤 끝이 없었다.
‘교육수도, 대구’라는 것도 그렇다. 교육에 있어서는 대구가 최고라는 의미인 듯하나, 이 케치프레이즈는 자칫 수도가 제일이며 지방은 그렇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지방시대라고 외치는 지금, 굳이 수도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교육의 중심. 대구’면 충분할 듯한데..
외국에서는 공공이 사용하는 기관의 이름에 거창한 목표나 이념을 담지 않는 경향이다. 그냥 편하고 수요자들이 부르기 쉽고 친근한 것을 사용한다. 올해 말에 개관하는 핀란드의 중앙 도서관 이름은 ‘우디(Oody)’다. 공모해서 결정 되었는데 엄숙한 명칭이 아닌 그냥 부르기 좋은 우디다. 별 뜻이 없다. 도서관 이용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헬싱키 사람들의 생각과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대구에도 이름을 공모한 도서관들이 있다. 용학도서관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이름이 참 어렵다. 명칭만 놓고 볼 때 어디에 있는지 무슨 뜻인지도 짐작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친근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공급자 중심의 작명에서 빚어진 결과다.
대구시 교육청이 제안한 ‘착한 교복’역시 소비자 보다는 공급자 우선의 이름이어서 불편하다. 학생들에게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편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새로운 교복을 선보이겠다는 교육청의 뜻은 충분히 착하다. 그러나 이를 입어야하는 학생들에게 착한교복은 매력적이지 못한 이름이다. ‘착해야 한다’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들에게 교복마저 착해야하다니.. 소비자인 학생들의 눈높이와 감성에 무신경한 작명이다. 더구나 착한교복은 기존의 교복업자들에게 자신들이 해온 교복은 상대적으로 ‘나쁜 교복’이라는 인상마저 줄 수 있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다.
반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름도 있다. 대구의 도시철도 3호선의 애칭은 ‘하늘열차’다. 3호선이 ‘지하철 아님’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상상을 자극시켜 한번 타보고 싶게 만든다. 명칭 하나가 대구에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도 있고, 열려있는 도시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에 이런 이름은 반갑다.
헬싱키의 시민들은 도서관 이름 하나를 얻기 위해 수년간 의견을 모으고 관심을 쏟았다. 그들이 만들어낸 공공의 이름은 한 도시의 수준이며 감성일 뿐 아니라, 제대로 된 명칭은 나라의 이미지를 바꾸고 지향점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시의 수준은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지역 기관이나 단체서 짓는 이름들이 까탈스러울 만큼의 감각으로 보다 세련되길 기대해본다.(동일문화장학재단 협찬)
김순재 학력 및 경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현), 전 매일신문 편집부국장, 경북대 문리대 영문과졸, 계명대 여성대학원 소비자학과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