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상자인 김동원 시인은 1962년생으로 영덕이 고향이다.
1994년「문학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태양세프’로 당선됐다.
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외 4권의 시집, 수필집, 평론집 등을 발간하였고, 많은 작품을 각종 지면에 발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대구예술상과 대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수상소감>
천명의 소리
고운 최치원 선생(신라, 857년~?)과 저와의 인연은, 그 분의「추야우중秋夜雨中」을 서예로 임서하면서 부터입니다. 오언절구인 이 한시를 수십 번 행서로 써 내려가면서, 그 속에 담긴 ‘쓸쓸한 가을’과 ‘비’의 행간 속에 젖은 적막이 좋았습니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빈공과에 장원한 천재 고운은, 훗날 신라로 돌아오지만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합니다. 하여,「추야우중秋夜雨中」속엔 갈바람이 부는 깊은 밤 창 밖에 내리는 ‘비’를 통해, 6두품으로써의 현실의 한계와 신라 개혁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운의 탄식이 절절합니다. 고운은 ‘창(窓)’을 통해 세상 밖에 눈을 돌리기도 하고, 그 창을 통해 세상과 단절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신라의 이쪽과 저쪽 사이에 초연할 수 없었던 자아의 번민은, 등불에 비쳐 만 리 밖의 시인의 고뇌로 다시 태어납니다.
제게도 시법(詩法)은 늘 무량합니다. 모든 사물의 근본은 하나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듯, 시법은 한 곳으로 귀착되나 그에 이르는 길은 천만 갈래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세계, 그것이 시입니다.
유(有)가 유가 아니며 무(無)가 무가 아니듯, 시는 물질이자 에너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란 그저 언어예술의 차원만은 아닙니다. 언어 이전의 사물과 실재의 비밀은 억겁을 통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생기(生氣, 生起)에 있습니다. 시는 이런 생생한 기운과 일어남, 사건 그 자체입니다. 찰나에 떠오르는 생각의 기미(機微)와 기색, 기척은, 시인이 아니면 잡을 수 없습니다. 하여 시인은 시신(詩神)과 접하거나, 시마(詩魔)에 들리어 귀신도 반할 귀시(鬼詩)를 짓거나 귀경(鬼景)을 펼쳐 나갑니다.
시의 예지가 번뜩이는 광인(狂人)이야말로 다름 아닌 시인입니다. 시구 한 자를 빼면 우주가 무너지고, 시구 한 자를 더하면 한 우주가 생겨나는 묘처가 시입니다. 시는 한바탕 무의식의 꿈이라도 좋습니다. 그 꿈을 깨고 나면 형(形)은 상(象)에 숨고, 상(象)은 다시 형(形)에 숨느니. 형상은 호흡에, 호흡은 형상에, 이것은 저것에, 저것은 다시 이것에 숨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이 바로 시입니다.
《최치원 문학상》대상 수상 소식은 저를 한없이 무람하게 합니다. 고운 선생처럼,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지도, 창 밖에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만 리 밖의 그리운 것들을 애틋하게 불러내지도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대의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시대의 불의에 항거하지도 못하였으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과 같은 명문도 남기지 못한 제게, 이런 과분한 상은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자못 분발을 자극합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시 세계에 덧대 한국현대시사에 독자적 서정의 세계를 열어나갈 것을 채찍 하는 천명의 소리로 듣겠습니다.
〈고운 최치원 문학상 대상 수상 작품∥오십천 외 4편〉
오십천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오십천은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영덕읍을 가로질러 강구항으로 흘러듬.
깍지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귓속 물이 차
띠풀은 귀를 허공에 넣고
비가 빗소리 몰고 오는 짓을 다 듣고 있었다
그 아랫도리 벌쭉한 새 무덤 위에서
참 희한도 하지
비가 빗소리 몰고 가는 짓을 다 알고나 있었다는 듯
띠풀은 귓속 물이 차
자꾸 자꾸 왼쪽 귀를 털고 있었다
무중력
―오너라, 내 가슴 속에, 매정하고 귀먹은 사람아
(「망각의 강」중에서―보들레르)
끝내 저렇게 내린 흰 눈 위에 길이 지워지겠구나
아들이 올 텐데
어둠은 자꾸 병원 격자창에 차갑게 들러붙는데
입술로 흘러든 망각은 물이 찼는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쉴 새 없이 웅얼거리다 졸아 붙은 치매 입술
수북 빠진 머리칼 곁에 헝클어진 늙은 의자 한 개
아들이 올 텐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함몰된 기억 뒤쪽엔
뼈만 앙상한 등 받침만 남은 채
복도 계단 밑 웅크린 여자의 눈 풀린 동공 속엔
밤새 녹아내린 흰 눈이 또 길을 지우겠구나
쥐떼
두 마리인가 싶더니 순식간, 수 십 수 백 수 천 마리로 불어난 쥐떼들이 완장을 차고, 검은 고양이 한 놈을 뜯어먹고 있었다. 한밤중 쉿, 쉬잇, 쉿, 서로서로의 혼을 호리는 소리는, 죽음 직전 갈라터진 쉰 목소리 같기도 했다. 저 먼저 가겠다고 악 쓰는 놈이 있는가 하면, 재빨리 선두 대열에 끼어 또 다른 괭이로 변신하는 놈도 있었다. 벽 쪽에 옮겨 붙는가 싶더니, 주저 없이 흩어졌다 불어났다 종잡을 수 없었다. 목적 앞에 수단은 일사불란했다. 본능적으로 그놈들은 시대를 꿰뚫고 있었다. 뭉친 힘이 얼마나 센지, 결국 그 뒤엎는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쥐덫은 더 이상 그들에겐 악법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