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경기도 웅진군 안평리, 1960~1989)의「빈집」은, 사랑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스물아홉에 요절한 시인이다.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서울 종로 파고다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닥친 불행이었다. 그해 5월 문단 지인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 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1989, 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된다. 시인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부 비평가에 의해서만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자, 그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젊은 비평가와 시인들에게 가장 많이 주목받은 시집이 되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 한 편 한 편은, 새로운 고전으로 우리 문단에 자리 잡고 있다.
표면적으로「빈집」은, 사랑의 상실을 노래한다. 그러나 심층에는 이 시가 기형도의 죽음을 예언한 시처럼 읽힌다. “문을 잠그네”, “빈집에 갇혔네”라는 시적 표현 속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 예언이 되는 경우”(정민)의 시로써, 시참(詩讖)에 해당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도 있듯, 말 속에 주술적인 힘이 들었음을 이 시는 증거한 셈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시적 화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사랑의 상실은 뼈아픈 법이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요절을 암시한 무거운 함의 같다. 물론 사랑의 본질에 대한 화자의 고뇌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시구이기도 하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은 참으로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체화한 허무한 풍경이다. 안개는 사랑처럼 생겨나서, 홀연히 바람에 의해 사라져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그렇다. 그 무수한 사랑의 촛불들은 이별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몽매했던 자신의 과거를 성찰과 후회로 번민한다. 사랑 뒤에 남은 이별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은, 화자에겐 극도의 참담함과 환멸을 가져다준다. 끝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에게 비탄의 노래를 부른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망설임과 공포가 지나간 그 아픈 기억들은, 마침내 나의 것이 아닌 것들로 무화된다. 화자는 지금껏 겪은 모든 고뇌를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고 체념한다. 기형도는 이렇게 시「빈집」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내 사랑 빈집에 갇혀” 죽음으로 문을 닫고 만다. 오직「빈집」한 채만 남긴 채, 저승으로 새집을 지으러 떠났다.
“기형도의 시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견디는 시의 강렬한 내구력이다. 그의 시 내부에서 떠돌고 있는 끊임없는 죽음에의 예감. 우리는 기형도의 시 도처에서 그 예감의 색깔로 물든 어느 푸른 저녁의 축축하고 불길한 안개를 만난다. 시인은 이미 그의 시 속에서 충분한 죽음을 살았던 것이다. 기형도 시의 강렬한 내구력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시인을 습격했던 바로 그 죽음에서의 예감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기형도의 언어들은 유예된 죽음의 언어이다. 죽음에의 에감으로 끝없이 죽음 이후의 삶을 연장해가는 언어. 지금까지 우리 시에서 죽음과 절망을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았던, 그리고 그것을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의 성(城 )으로 쌓아올렸던 시인은 없었다. 기형도, 그토록 치명적이고 불길한 매혹, 혹은 질병의 이름”(『기형도 전집』(1999, 문학과 지성사) 참조)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