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赤, 迹, 敵, 吊)
- 작약
정훈교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읍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Paeon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 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로 피었다가 망국으로 지는 꽃들의 전설을 지금 기록 중이군요 5월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돈의 난장이었다가 지는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不立文字
정훈교 시인은 1977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또 하나의 입술』(시인동네, 2014) 속에 수록된 시,「적(赤, 迹,, 敵,, 吊)」은 다층적이다. 그의 시는, 붉을 적(赤), 자취적(迹), 대적할 적(敵), 이를 적(吊), 이 ‘넷이거나 아니거나’ 이다. “시는 ‘불안’하고 ‘불온’하고 ‘불편’한 곳으로부터 온다. 시인은 병들어있는 상태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유마경>의 유마힐처럼 앓아 누운 자이다. 왜냐 하면 세상이 병 들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세상이 아프면 언어로 함께 세상을 앓는 자이다. 살아서 죽음을 미리 앓으면, 죽을 때 앓지 않아도 된다.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는 존재가 시인이다. 하여, 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려면 아름다움의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시인은 ‘아름다움에 속하는 자’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김수상)
정훈교의 시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만큼 순수하다.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만이 붉은 꽃잎의 기록을 안다. 이런 바람의 알레고리는 다분히 여러 겹의 은유를 가진다. 그의 시는 난해하다. 아니 불안하다. 시의 표층 위로 ‘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월의 흘림체”로 앓는 바람을 읽기 때문이다. 행간과 행간 사이는 비어 있다. 정훈교의 ‘빔’의 시학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언어로 가득 찬 ‘빔’이다. “물결에 닿는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 묘리가 있다. 하여, 그의 세계는 “봉분 아래 꽃그늘”이 환하다. 정훈교의 시가 ‘불안’을 먹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작약의 발목”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생성과 소멸, 생과 사, 충만과 텅 빔, 이런 다층의 언어 겹이 존재한다.
요즘 젊은 시의 특징을 ‘부조리 시’로 정의 한다. “젊은 시는 재밌다. 그리고 재치가 넘친다. 특히, 그럴듯하다.” 반면 “어렵고 난해한 것은 미숙한 것과 통한다.”(황동규) 말하자면 육화된 대상에 고통이 없다. 너무 함부로 언어를 먹고 배설한다. 몸을 관통한 이미지보다, 관통한 척한 이미지가 더 사실적이다. 그러나 정훈교는 “제 나름으로 익힌 시적 호흡법”만 자신의 시로 인정한다. 현대시가 “도통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사람들에게, “왜 시가 알아들어야죠?”라고 반문하다. 기성 서정시가 ‘집밥’이라면, 젊은 시는 색다른 ‘외식’이라고 강변한다. 사실 1990년대 이전의 시들이 주로 감성과 교훈의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2000년대 이후는 개인의 다양성으로 시의 시선이 옮겨갔다. 시대의 풍경이 바뀌면, 시의 소재도 바뀐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젊은 시의 특징은 ‘개인’적 세계에 갇힌 느낌이다. 소통의 부족에서 출발하지만, 언어를 갖고 노는 방식만은 혁명적이다. 기존 서정시가 감정의 자물통을 여는 방식이 모두 같다면, 젊은 시는 각자의 방식으로, 언어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비밀번호를 풀어야 한다.
시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장르일지 모른다. 정훈교는 이미 존재한 시 형식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비시적(非詩的)’이라고 질타한다. 창조야말로 기존 질서를 전복할 때 탄생한다. 지금 시대에는 지금에 맞는 시가 필요하다. 하여, 정훈교는「적(赤, 迹, 敵, 吊)- 작약」을 통해,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돈의 난장이”로 본 것일까. 아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으로 본 것일까. 또 또 아님, “당신이기 전에 당신, 이 버린 최후의 不立文字”로 읽은 것일까. 물론,「적(赤, 迹, 敵, 吊)-작약」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관한 시로도 읽힐 수 있지만, 고대 국가 조문국(召文國)의 흥망성쇠에 대한 이야기다. 조문국은 의성의 옛 지명이며, 작약 꽃밭이 환상적이다. 파이온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약초를 이용해 신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신들의 의사’를 뜻한다. 이때 신(神)의 병을 낳게 하는 약초가 바로 ‘작약’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