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
여정
손님♀와 점원♂의 대화볼륨이 점점 높아진다.
손님♀는 옵션으로 노란머리에 파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주문했고
점원♂는 옵션으로 파란머리에 노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만들었다.
점원♂는 파란머리에 갈매기표시 노란눈동자에 갈매기표시가 된 견적서를 내보이며 손님♀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코너에 몰린 손님♀는 점원♂가 표기를 잘못했다며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옆에 있던 주인♂는 우리 가게에서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며 한마디를 거들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손님♀는 머리에 플로피디스크를 꽂고 음성기록파일들을 복사해 주인♂에게 건네준다. 검색하게 한다.
“옵션으로 노란머리에 파란눈동자를 해주세요.”
음성기록파일에 주인♂가 코너로 몰려버린다. 손님♀는 소송을 걸겠다고 하고 코너에 몰린 주인♂는 新옵션을 몇 개 더 추가해 주문한 아기를 새로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림도 없다던 손님♀가 견적서에 갈매기 다섯 마리를 더 그려 넣는다.
新옵션 추가 ― √ 볼륨조절성대 √ 피부색조절장치
√ 도수조절수정체 √ ♂↔♀변환장치
√ 업그레이드무료쿠폰 1장
그래도 화가 덜 풀렸는지 손님♀는 베이비스토어를 나오면서 주인♂에게 한마디 더 쏘아붙인다.
“앞으론 아기를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베이비스토어를 나오자 손님♀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바코드를 붙인 갈매기 다섯 마리가 승리의 V字를 그리면서 도심 위를 유유히 날고 있다.
근대와 현대 추상시의 경계를 나는 이상 이전과 여정 이후로 가른다. 이 둘의 공통점은 전시대의 서정시법을 새로운 화법으로 치고 나온 일이다. 하여 기존 시 체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체를 제시한 것은 혁명적이다. 이상의 시가 개인적 자폐와 근대적 폐쇄성에서 머물렀다면, 여정은 이상(李箱)적 자의식에 매몰되지 않고, 현대적 서정을 미래과학에 자신의 시를 접속한다. 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미래에 충분이 일어날 개연성이 있는 인간복제를 시의 주제로 다뤘다. 그의 첫 시집 '벌레 11호'(2011, 문예중앙) 속에 수록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2000년 10월 '현대시학'에 발표된다.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2005년 개봉된 영화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를 연상시킨다. 2019년을 배경으로, 자신들을 지구 종말의 생존자로 믿고 있는 링컨6-에코(이완맥그리거)와 조던2-델타(스칼렛 요한슨)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인간을 복제한 클론이다. 클론의 목적은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일회용 소모품이자 제품에 불과하다. 장기 교체는 철저히 부자만 할 수 있는 자본 논리로 부각된다. 클론의 몸에서 적출된 장기는 병든 부자 인간 장기와 교체되며, 갑작스런 사고로 아이가 죽으면, 복제된 클론이 그 아이의 삶을 대신한다. 대리모는 영아를 낳자마자 곧바로 살해되어 무참히 버려진다. 우연히 링컨6은 장기를 적출당한 동료 클론이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여자 클론 조던과 탈출을 시도한다. 아일랜드는 인간들이 복제 당시부터 클론의 머릿속에 주입한 환상의 섬이며, 존재하지 않는 곳이자 죽임을 당하는 가상공간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이기적인 인간 본체가, 부조리를 자각한 복제된 클론 링컨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설이 묘하다.
인간 복제는 인간의 역사에선 획기적 사건임엔 틀림없겠으나, 윤리적인 측면에선 부당할 수도 있겠다. 원본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로, 복제인간의 장기를 마구잡이로 적출해도 되는 것인가. 소나 말처럼 그들을 노예처럼 혹사시켜도 되는가. 복제인간이 원본인간과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졌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점이 그것이다. 한편, 인간복제 기술이 허용되길 현실에서 고대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불임부부, 난치병 환자, 여타의 희귀병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환자들에겐 인간복제야 말로 복음이다.
인간복제와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과 성찰, 폭로와 경고가 담긴 여정의 시집 벌레 11호 4부에 수록된 「ABC침대 위의 ♂♀」, 「콘센트♀의 하루」,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는 과학적 미래시의 전형이다. 특히,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는 인간의 체외수정(정자은행, 난자은행)을 상상력과 버무려 비판적인 목소리로 현대를 질타한다. 이 시는 또, 상업적 목적으로 출생이 선택되고, 판매의 목적으로 아기들이 양육되는 참담한 현실과 비인간화에 대한 미래에 닥칠 비극의 노래이다.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보다 훨씬 앞선 미래사회의 이야기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듯, 링크 머신을 통해 인간의 의식으로 아바타 몸체를 원격조종할 수 있는 인간과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 나비(Na’vi)의 DNA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하이브리드 생명체보다 훨씬 진화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 속의 상업용 복제아기는 충격적이다. 마음대로 아기를 만들어 대량으로 판매하는 미래사회는 가상현실이 실재보다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손님♀는 옵션으로 노란머리에 파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주문했고/점원♂는 옵션으로 파란머리에 노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잘못 만든 것이 다툼의 발단이다. ♀(여자), ♂(남자)로 읽어야만 해석되는 기호는 아주 참신하다. “주인♂는 우리 가게에서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는 말에서 보듯, 시 속의 화자 ‘손님♀’, ‘점원♂’, ‘주인♂’은, 원본인간이 수백 년 동안 복제인간의 장기를 적출해 생명을 연장해 살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아기(생명)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미래 공간과 요구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옥식각신 싸우는 광경을 우스꽝스럽게 설정한다. 이런 시대에 “앞으론 아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손님♀의 말은 해학과 풍자적 수법을 통해 독자의 의표를 찌른다. 점점 상업화 기계화 프로그램화 기호화 되어가는 현대를, 또 더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는 미래를, 여정은 과학적 미래시라는 독창적 그릇 속에 담았다.
언제나 시대가 언어를 규정한다. 나름, 현대시에서 ‘전통’의 계승은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없지만, ‘실험’의 파격성이 기상천외한 예술로 진화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미래시파는 초현실주의에 뿌리를 박고 기존 서정시를 박차고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적 시법을 건설한다. 물론 이런 미래시파는 크게 보면 현대시사의 한 유파이겠지만, 이성과 의식의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며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마구 뿌려 되는 수법이야말로 현대시의 진일보이다. 마치 표현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우연히 ‘자신의 몸짓과 물감통의 반복 운동’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미를 발견한 것처럼, 미래시파 역시 그들의 무의식의 세계를 한국 현대시사에 마구잡이로 뿌려대고 있다. 여정을 포함한 일군의 미래파의 시적 출현은 1999~ 2000년 세기말이 인간에게 준 엄청난 불안 의식과 비인간화된 인간 종말이 과연, 미래사회에는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불확정성에 대한 의문을 시를 통한 인간의 새길 찾기의 한 방법으로 제시한 젊은 시인들의 시적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겠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