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의 반대
최백규
나는 횡단보도를 보면 자꾸만 연주하고 싶어진다
#1이 신호등을 기다리면 반대의 횡단보도는 피아니시모
누구 하나 다 건넌 길의 뒤를 돌아보지 않아
솟아오르는 표지판의 뒷면이 항상 궁금했다
하얀 건반만 밟아나갈 때
초록 머리의 소녀가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질 때
뒷면이 흘리고 간 무지개를 먹고
그녀의 얼룩무늬 원피스를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 태양의 14시는 발기된 혓바닥으로 중앙선을 핥고 간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돌기에 닿았을까
새의 심장을 관통하는 무수한 2차원들
나의 등뼈 위로 질질 흘리는 은근한 체크무늬
처음으로 알게 된 폐부의 간지러운 감각
새의 목을 잡아 비틀면
쏟아지는 내핵
자기장을 잃은 지구는 참 울퉁불퉁하구나
네가 마모되는 동안 나는 멀리 떨어져 앉아 구경을 했지
너 참 재미있는 아이구나
푸른색을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10층에서 1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뛰어내려야 해
푸른색도없다니쓸모없는새끼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
손목이 비틀어지고 새의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해바라기의 고개가 꺾이는 장면을
어느 영화에선가 본 적 있지
무언가 시작되기도 전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아무도 없나 봐, 저기 새가 날고 있잖아
어디? 스크린 뒷면 오른쪽 위에 보이잖아! 눈을 감아야지 이 바보……
너의 눈알이 해체되는 사이- 그 속에서 태양계 너머의 영화를 볼 텐데
멋지지 않니?
횡단보도 밑 아스팔트가 카펫처럼 일어나 둘둘 말리기 시작하고
늘 바닥의 반대편이 궁금했었는데 얼룩말의 등껍질이다
* 1) 얼룩말의 가족단위는 1마리의 수컷과 여러 마리의 암컷, 새끼들로 구성된다.
1992년 대구 출생인 최백규의 시「얼룩의 반대」는 2014년『문학사상』신인상 수상작이다. 제목부터 시니컬하다. 기존의 제목을 붙이는 방식은 ‘전체 의미를 함축하거나’, 내용과 연상된 단어이거나’, 시행이 그대로 제목인 예’ 등 일 것이다. 미래파시가 그렇듯, 그가 붙인 제목 또한 다분히 모호성의 사적 징후를 보인다. 낯선 어법, 새로운 상상력은 다분히 개성적이다. 「얼룩의 반대」는 현대사회의 그늘을 ‘얼룩’으로 표상한다. ‘얼룩’을 통해 그 ‘반대’의 몰개성적인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의도로 읽힌다. 이 시의 특징은, 현실을 낯선 시점으로 해석해내려는 시도와 끊임없이, 다층의 초점으로 사회를 새롭게 명명하려는데 있다. 미래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과거 전통에 대한 부정이듯,「얼룩의 반대」역시 기존 서정시의 화법을 뒤집었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이 세계는 불평등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의 기저에 깔고 있다. 이런 시의 시선은 끊임없이 죽음으로 경도 미화된다.
첫 행에서 횡단보도를 피아노의 건반으로 본 음표적, 시각 유희는 독보적 시선이다. 이런 리듬의 이미지는 그의 시의 강점이자, 언어의 음악화이기도 하다. 독자들에게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하여 호기심을 극대화한다. 이런 비판적 이미지는 약자의 세계를 ‘새’의 목을 비튼 것으로 은유하여, 일상의 사유를 전복시킨다. 친구의 부탁(학연, 지연)을 거절하지 못한 채 10층에서 뛰어내려야만 하는 폐습의 알레고리는,「얼룩의 반대」가 함의하는 주제의식의 계단 아래 은밀히 숨어 있다. 또한 이 시는 수미상관을 빌려, 첫 연엔 대중들의 ‘꿈같은 현실’을 마지막 연엔 ‘현실 같은 꿈’을 횡단보도 이미자와 중첩시켜 내적 의미를 심화시킨다. 성적 메타포인 초록머리 소녀의 투입은 눈으로 보이는 가장 원초적인 것들(대중매체)에만 이끌려 다니는 대중의 어리석은 가치관을 반영한다. 횡단보도야말로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이 시의 가장 핵심 재료다.
화자는 끊임없이 독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으며, 확정되지 않은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불안정한 이야기를 양산한다. 이런 절정의 불안으로 이끌어 가는 시각적 이미지는 푸른색이다. 결국 색체 이미지느 순결과 순수의 가치에 닿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을 내포한다. 지구가 자기장을 잃고 분해되어 가는 시적 형상화는, 타자적 관점의 시법이다.「얼룩의 반대」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영화적 장면 연출의 묘(妙)이다. 슬로비디오처럼 전개되면서 중간 과정을 차단하고 바로 영화관(빛없이 갇힌 공간 = 죽음)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급박한 허무, 혹은 죽음으로 앤딩 처리된다. 자유를 스크린에 은유한 것, 영상매체를 인간이 쫒는 허상에 비유한 점은 빼어나다. 지구가 천천히 해체되어가는 사이, 느린 시선이 갑자기 횡단보도로 빠르게 옮겨지는 의식의 순간적 이동은. 이 시를 추상의 아름다움과 비약으로 클로즈업시킨다. 결국「얼룩의 반대」는 횡단보도(얼룩)의 안쪽(반대)을 보여주면서 삶과 사회의 단절된 뒷면을 부조리의 눈으로 응시한 낯 선 시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태양 셰프』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저녁의 詩』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텃밭시인학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