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랍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송수권(宋秀權, 1940~2016년 전라남도 고흥 출생)의「여승」은 첫 시집『산문에 기대어』(1980년, 문학사상사)에 수록 되어 있다. 이 시는 누구나 도달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형적 순수함의 상징을 작품화했다.
백석의 「여승」 이후 현대 시인 중 송수권 만큼 ‘여승’을 고귀하고 청초하고 외롭고 순결한 이미지로 변주에 성공한 예도 드물다. 「여승」의 시적 상황은 고뿔 앓는 사춘기의 소년이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고깔 쓴 여승”이 염불 외는 것을 훔쳐보는 것으로, 송수권 개인의 직접적 체험이 시 속에 녹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춘기 소년의 순수한 호기심과 여승의 종교적 성스런 순결성을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황홀한 마음”, “낮달의 포름한 향내”로 표현했다. 특히 “포름한 향내”는 삭발한 앳된 여승의 윤기 나는 머리의 ‘시각의 후각화’로, 시적 화자의 함축적이고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곱고 애잔하게 클로즈업시킨다.
사실 이 시의 백미는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압지요”라는 구절 속에 함축되어 있다.
소년의 풋풋한 사랑을 비껴가는 여승의 내면적 심리가 암시로 잘 나타난다. 암시야말로 상징과 비유를 넌지시 깨우쳐 뒤받침 해주는 역할을 하며 시어의 뜻을 직접 말하지 않고 에둘러 분위기를 풍긴다. 심리학에서 암시는 직접적 행동을 불러일으키며 상당한 최면 효과도 지닌다. 아니나 다를까, 송수권은 바로 그 다음 시행을 통해 소년의 심리적 행동을 직접 유발시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로 ‘여승’에게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까움과 종교적 성스러움으로 승화시킨다.
송수권은 참으로 질박한 농투성이상(像)이다. 그의 얼굴상(象)은 통나무에 새긴 것 같은 굵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미당 서정주의 ‘한국인의 원형’ 시법을 배우되 그곳에 함몰되지 않고, 박재삼의 한국 여인의 정한(情恨)을 익히되 그 늪에 빠지지 않은 자신만의 시 속에 한국인의 민중 의지를 끌어안음으로써 20세기 한국 서정시의 한 축을 받쳤다.
송수권의「한국의 강」은 우선, 시의 스케일이 장엄하고 호쾌하다. 민족의 강물을 통해, 한국어의 질감과 생명의식을 분출하고 있다. 강물을 한 그루 뿌리로 본 시각은 시인만의 독창적 독법이다.
“제 날기뼈”를 쳐서 저 깊은 골짝에서 금강을 향해 밀고 가는 강물의 힘을 민중으로 상징화 한 점은, 기존 서정시에서 한 발 더 딛고나간 근육질의 표현이다. 그는 토속적 언어를 비벼 현대 미학으로까지 치고 나가는 자신만의 신선한 시어 감각을 갖고 있다.
외세로 은유된 “어떤 창”과 “대포알”이 와도 한반도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이 시는 암유 한다. 그의 시풍을 김소월 김영랑 백석 서정주 박목월 박재삼을 관통한 한국 원형정서를 잇는 시인으로 주목한 점은, 이전, 근대 서정시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역사의 폭력성과 부조리함을 희망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내었기 때문이다.
송수권의「한국의 강」이 주목받은 까닭은, 잃어버린 백제의 정서와 지리산을 중심으로 억눌린 민초들의 해방감을, 섬진강과 서해를 잇는 “전라도 사투리가 열매들처럼 툭 툭 불거”지는 남도 정서로 부활시킨 점에 있다. 또한 그의 시는 잊혀져간 민중들의 강인한 삶을 시 속에 끌어옴으로써, 산업화와 도시화를 극복하며 고향의 부재와 역사성의 상실을 성찰하도록 한다.
하여, “송수권의 전통주의는 한국 근대시에 잠재하고 있는 모더니티 지향성과 근대 지향성의 대립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응답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와 기법의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에 연결된 것이다.
혹자는 그의 전통주의를 시대착오적인 것, 혹은 낡은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간주할지도 모른다. 근대를 지배하였던 저 거대한 계몽 담론들조차 도도한 해체의 물결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있는 시대에, 이미 지나간(혹은 청산된) 구시대의 낡은 정신을 붙잡고 감읍에 빠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 김영랑, 백석, 서정주, 박재삼 등 한국시에 등장했던 전통주의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 근대시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주의적 작품 창작을 통해 이 시인들이 자기 시대의 문제 즉 근대성의 위기에 대해 미학적 저항을 시도하였다는 점일 것이다.”(남기혁,「경계 너머에서 울려오는 전통의 목소리」중에서.)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 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