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꽃 핀다 이제
마음 한 잔 매화 한 잔
겨울 눈 내리는 날
나, 꽃 핀다 이제
우전차 앞에 두고
여윈 잎맥 그대로 드러낸 채
뜰 앞 햇살 곱게 펴어
빛바랜 사진 속 그녀를 들춰 보네
분홍빛 두 볼은
꽃 피어 봄날인데
비껴간 운명
바람 소리 차가와도
나, 꽃 핀다 이제
흰 눈 한 잔 매화 한 잔
시는 쓸 때만 시인이다. 겨울 설매(雪梅)는 제 스스로 향기를 낼 줄 안다. 몸과 정신이 다르지 않듯, 시는 현실 공간과 시의 공간이 둘이 아니다. 시는 자신의 체험의 깊이를 시 행간 속에 깊이 밀어 넣는 작업이다. 시는 사물을 담는 일이자, 췌사(贅辭)를 버리는 일이다. 시작(詩作)은 깨어있는 나를 만나는 시공간이다.
이번 박종승의 시집『풀씨 법문』(2020, 그루)은 편편 마다 격물(格物)을 통해 치지(致知)에 이르는 사랑채의 언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주희가『대학장구』에서 언급한 것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 앎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 경우 격물(格物)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라면, 물격(物格)은 사물의 이치를 내가 안다, 내가 이해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사물’과 ‘나-시인’,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말(언어)’이다. 말과 사물의 관계는 필연적이지도, 그렇다고 불변적인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 가로 놓인‘벌거벗은 경험’으로서 심연에 대한 느낌이 중요하다. 말과 사물의 단절과 이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마음의 현상(학)과 만나게 된다. 마음이 생기는 까닭에 모든 법이 생겨난다는 원효의 말처럼, 마음의 문제는 곧 말과 삶의 문제에 속한다. 사물의 응시에 대한 나의 대답이 시라면, 시는 앎과 느낌의 한 방법에 다름 아니다.”(김상환)
하여, 박종승의 시는 고향 정서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의 다채로운 꽃밭을 이룬다. 그는 틈만 나면 소담하고 푸근한「고향집 우물터」를 기웃거린다. 귀한 마음으로「어머님의 산」앞에서 바장인다. 세상이 싫으면 저 세상 가신 그녀를 꿈속에서 만나 함께 뒷산을 걷기도 한다. 그의 시는 산천의 편안함이 있고, 따뜻한 서정을 꿈꾼다.「사랑채」는 할아버지의 잔기침이나 인기척을 통해, 높은 선비 정신을 추구하기도 하고, 눈앞의 온갖 현실의 그늘을 지엄한 시의 스승으로 모시기도 한다. 그에게 시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푸른 말」이자, 바른 길로 걷게 하는 고향이자 모성이기도 하다. 이루지 못한 어떤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을「낙화」로 풀어내는가하면,「풀씨 법문」에 이르러선 불교에 대한 예리한 법담을 주고받는다. 이런 시안(詩眼)은 ‘풀씨’들의 말을 통해 법문으로 화답한다. 시어 한 줄 한 줄을 정성껏 깁는가 하면, 박종승은 밤낮 자신의 시들을 탁마 한다. 하여, 누구나 아는 그런 쉬운 느낌과 감정으로 시를 기루고, 우리 모두의 노래로 불리어지길 고대하는 것이다. 좋은 시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의 노래이자,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별 같은 언어여야 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수작「나, 꽃 핀다 이제」는 삶의 행복을 성찰하게 한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서 ‘시’와 함께 할 멋진 도반은, ‘차 한 잔’의 여유일 것이다. 다시(茶詩)「나, 꽃 핀다 이제」는 노자의 이름 지을 길 없는 ‘한 물건’을 연상시킨다. 이 시는 다선일여(茶禪一如)이자 다시일여(茶詩一如)의 경지로 끌어올린 시이다. 번다한 세계를 벗어나 맑은 정신을 가다듬어 도(道)로 들어가는 깨침이 있다. ‘나, 매화, 겨울 눈, 그녀, 우전차’로 연결되는 시상 전개는 꽃빛처럼 밝다. 꽃향기 차향기가 시의 방안에 가득 흘러 다니는 것이 보인다. 읽을수록 절로 설레는 이 시는, 욕망이 일시에 허물어지고, 한국화의 여백처럼 마음이 비워진다.
「나, 꽃 핀다 이제」란 시는, 박종승의 심의(心意)를 가장 잘 대변한 시로 읽힌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산업화를 거쳐 황금만능주의, 정보 혁명의 급속한 대 변혁의 시기를 겪고 있다. 기존의 귀한 가치관은 멀어지고, 혼란스런 온갖 현대 신조어들이 넘친다. 이런 탁류의 시대엔 반드시 시가 필요하다. 시는 화려함 뒤에 감춰진 쓸쓸하고 외로운 것들을 위해 쓰여 진다. 빈익빈 부익부의 그늘진 삶의 투쟁 속에, 따뜻한 서정시 한 편은 위안이 된다. 참된 행복이란 소소한 일상일지 모른다. 밥 먹고 놀고 웃고 지치면 잠이 드는, 어린 시절의 아이 때처럼, 그런 놀이가 시의 본질일지 모른다.
박종승의 시구처럼 매화 핀 “겨울 눈 내리는 날” 우전차 앞에 놓고 꽃 필 줄 아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참으로 여유와 풍류가 멋스러운 시이다. 시는 날아다니는 자보다, 걷는 이에게 더 많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속도 보다 느림의 시학이어야 귀하다. 높음보다 낮음의 목소리가 더 시적인 이유는, 인간 삶이 궁극엔 외롭기 때문이리라. 시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찾기 위함이다. 이 우주의 주인이 누군가를 알기 위함이다. 그래서 시인은 옛 흑백 사진 속의 그녀를 떠올리며, ‘나’ 이제 시로 꽃 피는 가 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2020년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계간지 『문장21』 봄호 평론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