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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한 뒷간 이야기

전영귀


한나절 묵혀둔 찌릿한 압박에, 낮도깨비 성성한 뿔 깜박 잊고 가림 숲에 풀썩 들었어

달항아리 훌러덩 드러내어 가둬 둔 물꼬 트니, 배틀걸음 개미 행렬 물길 속 노 저었지

가문 논에 물댄 듯 야릇한 쾌감, 후희後喜 추스르는 다홍빛 치맛자락에 좋아라 달라붙는 도깨비바늘, 흥분이란 꽃말 괜한 뜻 아니었어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라며 아랫도리 콕콕 찔러대고, 떼 낼수록 집요한 구애, 달아오르는 내 얼굴

가랑이 사이로 뒤집혀 보이는 노을 엉덩이도,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어



시는 언어의 문학이자‘느낌’의 시학이다. 서정은 바람의 언어이다. 달빛에 매화 가지가 휘는 것을 보는 시안詩眼, 그것이 시의 빛깔이다. 시는 시인의 몸을 통해 천지간의 느낌을 분위기로 드러낸다. 물의 무늬로 사물의 감정을 크로키 한다. 휘파람새는 직관을 통해 숲의 기미와 기척을 알아챈다. 보이는 세계를 통해 허공의 깊이를 잰다. 이미지는 행과 연 사이에 바장이는 기氣의 그물을 짠다. 절박한 시가 감동을 낳는다. 체험의 상황과 맞물릴 때 시 행간의 의미는 팽창한다. 언어는 바람의 풍화에도 자신의 지문을 남긴다. 개방성의 언어는 독자에게 열린 창窓이다. 시는 그 창窓을 통해 안과 밖의 귀엣말을 한다. 서정시는 개인의 작업이지만 대중성에 발화할 때 폭발한다. 시는 천지만물의 생사를 응시하는 사색이다. 세계의 비밀을 감성의 열쇠로 연다. 시는 문체를 바탕으로 언어의 끌로, 시인의 내면 깊이를 각刻하는 작업이다. 구체를 통해 추상으로, 추상을 통해 구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삶의 재발견은 낯선 느낌을 통해 신선해진다. 평이한 언어로는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 다시점多視點을 통해 사물의 고통을 진실의 세계로 건너 준다. 서정시의 수사 과잉은 시의 전반을 약화하지만, 주체가 분명할 때 빛난다. 단절과 비약의 극대화는 현대 서정시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좋은 시는 새로움과 그 너머의 세계의 가능성을 확보할 때 깊어진다. 사물은 침묵하고 시어가 말할 때 멋진 시의 신화가 시작된다. 구름은 형形과 상象을 수시로 변주한다. 하여, 서정시는 순간의 시학이다. 찰나의 연상이자 상상력의 극치이다. 흘러가는 흰 구름을 붙잡아 행간에 매단 것이, 서정시의 갈피다. 서녘 노을이 번져 붉은 물로 떨어질 때, ‘서정 그리기’는 시작된다. 그 설레임, 그 호기심, 그 메아리가 시의 느낌이다. ― 지금 어디에서 창문을 넘어 장미꽃 향기가 허공에 나래 치고 있다. 꼼꼼히 음송하면, 전영귀 시집『더 깊이 볼 수 있어 다행이야』(2021, 시와반시) 속에는, 코끝을 스치는 아름다운 시의 향기가 가득 난다.

시「野한 뒷간 이야기」는 “달항아리 훌러덩” 드러내고 다급히 볼일을 보는 여성 화자의 시점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시는 ‘노출’ 혹은 ‘훔쳐보기’이다. 관음증VOYEURISM은 자아와 타자 사이 성적 충동과 순수한 호기심, 혹은 병적 집착으로 번진다. 쾌락적 리비도는 예술 작품, 특히 영화, 미술, 시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런 주제는 상징적 표현으로 은밀하게 숨겨진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관음증적 경향은 성기를 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물론 자신의 성기가 보여지기를 바라는 변형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도착적 관음증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넘나들며, 사회의 논쟁점으로 비화 되기도 한다. 관음觀淫은 에로티시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관능적 사랑의 이미지를, 시인들은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작품 속에서 암시한다. 현대 사회에서 성욕을 상품화한 ‘포르노’는 부정적 인식을 남겼지만, 인간의 쾌락은 인생을 풍요롭게 자극하는 긍정적 측면이 강하다. 전영귀의「野한 뒷간 이야기」는 육감의 ‘감춤과 드러냄’ 사이쯤에 놓인다.

시적 묘사描寫description는 서사에서 주로 빛을 발한다.「野한 뒷간 이야기」는 ‘시가 태어난’ 상황과 장소에 대한 감각적 풍경 묘사가 디테일하다. 이 시적 상황은 여성의 ‘급한 볼일’에서 촉발한다. 장소는 강원도 죽서루 곁의 아름다운 “가람숲”이다. 이 숲에 뛰어들어 “달항아리 훌러덩 드러내고” 가둬 둔 물을 방뇨하는 장면은 관능적이다. 마치 영화 속 줌zoom으로 끌어당긴 한 장면처럼, 숲이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독자에게 ‘은밀’하게 보여준다. 오줌에 노를 저어가는 “개미 행렬”의 “배틀걸음”은 뛰어난 극사실의 묘사이다. 물살에 떠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휩쓸러 가는 개미들을 떠올리면,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가문 논에 물댄 듯” 화자의 기분은 “야릇한 쾌감”이다. 시「野한 뒷간 이야기」의 기막힌 시어는, “후희後喜”라는 한자어가 주는 묘한 뉘앙스이다. 이 시구는 “다홍빛 치맛자락에 좋아라 달라붙”은 “도깨비바늘”과 겹쳐, 괜히 읽는 이에게 낯뜨거운 ‘흥분’을 일으킨다.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인 도깨비바늘은, 관음觀淫의 창窓이자 에로티시즘의 주체이다. “가랑이 사이로 뒤집혀 보이는 노을 엉덩이도,” 볼 만한 환유이지만,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여인의 유혹적 은유는, 전영귀만의 발칙한 시세계를 열었다.


1962년 경북 영덕 구계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94년『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2020년『문장21』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구멍』,『처녀와 바다』,『깍지』,『빠스각 빠스스각』, 시선집『고흐의 시』,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시에 미치다』,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태양 셰프』출간하였으며, 시평론 대담집『저녁의 詩』를 편저했다. 대구예술상(2015),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2018), 대구문학상(2018), 영남문학상 수상(2020)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부회장 역임, 대구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원, 대구아동문학회원,『텃밭시인학교』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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